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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반일 무장투쟁의 거점이었던 연변 지역의 중심지 연길의 시장 풍경. 1920년대 말~30년대 초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③ 1920년대 연변 항일무장투쟁1644년 산하이관(山海關: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중국 화북의 군사 요지)을 돌파한 여진의 후예들이 베이징에 정좌했다. 천지신령과 조상들에게 중국의 주인이 되었다고 신고한 후 종족의 발상지 만주를 봉쇄해 버렸다. 2대 황제 홍타이지(皇太極)가 선양에서 대만주주의(大滿州主義)를 제창한 지 9년 만이었다.
그 후 200여년간 청 제국은 잡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족(漢族)들의 만주 이주를 엄금했다. 조선인들도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함부로 건너지 못했다. 산삼 채취나 담비 사냥, 벌목을 위해 몰래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많지 않았다.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는 경우도 새벽녘에 월경해서 온종일 밭일하다 해 질 무렵 터덜터덜 돌아오곤 했다. 간 큰 사람들은 봄에 왔다 가을까지 눌러앉기도 했지만 그것도 극소수였다.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사는 정착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19세기 중반이 되어도 한반도와 인접한 동만주 지역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하기야 한반도의 6배를 웃도는 광활한 동북지방의 전체 인구가 300만이 채 안 됐다.
1869년 함경북도 일대에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이재민들은 먹고살기 위해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강을 건너고 국경을 넘었다. 양은 질을 변화시켰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토를 일구는 정착민이 늘어났다. 특히 용정(룽징)은 인근 지역에 비해 조선인 증가 속도가 빨랐다.
투먼(圖們)강 유역 연변 지역에 정착한 조선인이 1만명에 육박하자 청나라 정부는 관리에 나섰다. 길림(지린)성 정부를 내세워 조선왕조와 ‘길조통상장정’(吉朝通商章程)을 체결하고 투먼강 북안에 ‘조선인 전문 개간구역’(朝鮮人專墾區)도 신설했다.
조국서 밀려난 연변 조선인들은 군사학교와 무장조직을 만들어 일본군에 대항해 총칼을 들었다
봉오동전투서 대승을 거둔 뒤 간도대토벌로 보복한 일제에 맞서 청산리대첩서 또한번 승리했다
무장투쟁에 관심 많았던 김일성은 공포주의적 투쟁을 비판하면서도 학교에 낸 글에 안중근을 찬양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만주에 정착한 조선인들이 일본제국의 신민(帝國臣民)이라며 이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연변에 간도파출소를 설치했다. 당시 청나라는 외국인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연변 지역의 조선인들은 소유권이 있었다. 중국인과 구별을 두지 않다 보니 중국 국민으로 인정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호칭도 ‘한국민족, 한국인, 중국한인, 중국조선인, 조선민족, 조선인, 고려인’ 등 다양했다. 일제는 조선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중국 국적을 취득하건 말건 내버려뒀다. 중국 국적을 취득하는 조선인이 늘어났다. 하다 보니 만주의 조선인들은 이중국적자가 돼버렸다. 일제는 이것을 미끼로 툭하면 청나라와 충돌했다.
1911년 중국에 신해혁명이 발발했다. 민국 정부는 일본이 조선인들의 이중국적을 방관하는 이유를 간파했다. 중국으로 귀화하겠다는 조선인들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조선에 가서 국적을 삭제하고 와라. 조선 국적이 말소됐다는 증명서를 제출하면 중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가 이런 증명서를 내줄 리가 없었다. 상황을 파악한 민국 정부는 귀화만 희망하면 무조건 받아들였다. 1915년 10월8일 일제는 조선총독 명의로 “중국 국적을 취득한 조선이민자는 제국 국적을 말소하지 않았다. 여전히 제국 신민이다”라는 훈령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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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도자 중 김일성과 가장 절친했던 저우언라이도 13살 때인 1910년 봄부터 3년간 랴오닝성 톄링(鐵嶺)과 선양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962년 6월 연길의 조선족 농가를 방문해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저우언라이. |
연변 지역의 조선인들은 교육열과 민족의식이 강했다. 특히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외삼촌 김약연(1868~1942)이 세운 명동(明東)학교는 모범적인 반일 계몽교육 장소였다. 김약연은 학생들에게 철두철미하게 반일교육을 했다. 거의 매일 학생들에게 작문 숙제를 내주고, 입학시험도 작문에 가장 비중을 많이 뒀다. 자신만의 평가 방법이 있었다. 작문에 ‘반일’(反日) 두 자가 없으면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합격시키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두서 없는 문장이라도 일본 욕만 나열하면 후한 점수를 줬다. 1920년 가을 일본 토벌대가 학교에 들이닥쳤다. 학생들을 운동장에 몰아놓고 교사에 불을 질렀다. 김약연은 너희들 멋대로 하라며 저항하지 않았다. 학생들과 함께 꼿꼿이 서서 건물이 완전히 불타 무너질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1년 후 다시 교사를 짓고 교육을 계속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폭발했을 때도 연변 지역의 조선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3월13일 명동학교 학생들을 선봉으로 수만명이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며 용정의 간도일본총영사관(전 간도파출소)으로 향했다. 이날의 반일시위는 경찰과 일제에 매수된 현지 군벌의 진압으로 19명의 희생자를 냈다. 17일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열렸다. 참석자들은 식칼, 곡괭이, 엽총, 낫, 몽둥이 등 닥치는 대로 들고나와 어디 한번 덤벼보라는 듯이 시신들을 메고 장지까지 시위했다.
이런 상황에서 비폭력 시위는 독립에 별다른 효용이 없다는 생각이 퍼졌다. 게다가 조국을 떠나는 조선인들은 점점 늘어났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연변 지역에 몰려들었다. 군사학교를 개설하고 무장조직을 갖추기 시작했다. 총칼로 강탈당한 나라는 총칼로 되찾는 수밖에 없었다. 독립은 외교다 뭐다 이런 거 백날 해봤자 될 일이 아니었다. 돈만 생기면 총을 구입했다.
1920년 1월4일 ‘철혈광복단’ 소속 조선 청년 6명이 용정 인근 동량리(東亮里) 부근에 매복했다. 일본은행 차량을 습격해 운송에 동원된 일본 군인들을 사살하고 철도 건설 자금 15만원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탈취한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한 명의 배신자가 나오는 바람에 막을 내렸지만, 이 사건은 연변 지구의 반일운동이 무장투쟁으로 전환되는 이정표였다.
망국을 인정하지 않았던 애국지사들은 출혈의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그 대표 인물 중 한 명이 평생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비장한 역사를 몸으로 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영웅 홍범도(1868~1943)였다. 장백산 일대에서 활동하다 소련으로 건너간 홍범도는 1920년 초 부대원들을 이끌고 연변 지구로 돌아왔다. 홍범도는 조선족 사회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다. 6월7일 일본군 1개 사단 병력이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근거지 봉오동을 공격했다. 봉오동은 지형이 삿갓을 뒤집어놓은 것과 흡사했다. 홍범도는 일본군을 움푹 파인 곳으로 유인해 대승을 거뒀다.
봉오동전투는 조선인 반일 무장세력이 중국 경내에서 일본 정규군에게 첫번째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연변 지역의 무장세력이 오합지졸이 아닌 것을 깨달은 일본은 출병 방법을 놓고 고심했다. 연변 지역은 누가 뭐래도 중국 영토였다. 조선족 무장단체를 제거하기 위해 출병하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말이 좋아 명분이지 명분과 핑계는 동의어나 마찬가지다. 들통이 날 땐 나더라도 그럴듯하게 만들면 되는 게 명분이다. 훈춘 사건을 만들어냈다. 봉오동 전투 4개월 후인 10월2일 오전 9시 일본군과 잘 통하던 마적 400여명이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공격했다. 영사관은 텅 비어 있었다. 마적들은 7시간 동안 중국인 70여명과 조선인 7명, 일본인 몇 명을 죽이고 영사관을 불질렀다. 이 정도면 일본이 끼어들 명분이 충분했다. 그날 밤 함경북도 나남에 있던 조선군(조선 주둔 일본군)이 두만강을 건넜다. 연변 지역에 대토벌을 감행했다.
조선인 무장단체도 반격에 나섰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반일 연합부대와 김좌진(1889~1930)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청산리와 백운평에서 일본군 1000명 가까이를 몰살했다. 연변 지역의 조선족들도 정보 수집과 탄약 운반, 부상병 호송에 힘을 보탰다. 일본군의 전승 신화가 완전히 깨졌다.
3·1운동 2년 전인 1917년 다섯살 때 중국 땅을 밟은 김일성은 어린 시절을 랴오닝성에서 보냈다. 아버지를 따라 린장(臨江), 바다오거우(八道溝), 푸순(撫順) 등을 떠돌며 소학교를 다녔다. 잠시 고향에 돌아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 집안인 외가 쪽에서 세운 창덕(彰德)학교를 다닌 것 외에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거의 모든 기간을 중국에서 보냈다. 소련 생활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김일성은 연변 지역의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1925년 다시 중국에 돌아온 김일성은 길림시 쑹화(松花)강변에 있는 위원(毓文)중학 시절에도 무장투쟁에 업적을 남긴 인물들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작문 교사의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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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 “1학년 을(乙)반 김성주와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내가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대하지만 안중근 식의 공포주의를 채용하는 것도 타당치 않다고 하자 그는 뭔가 깨달은 듯이 제국주의의 침략은 대재벌의 주구 한두명을 처단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군중을 교육시켜서 각오를 제고시킨 후 군중을 조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작문 시간에 제출한 문장에서는 민족영웅 이순신과 모험주의적 영웅 안중근을 찬양했다.”(이 내용은 중국 인민대학 역사학원이 엮은 <상웨 선생>(尙越先生, 중국인민대학출판사, 2011) 86, 90쪽에 실려 있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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