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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자신의 젊은 시절 닮은 김일성에 주목하다

思美 2014. 2. 18.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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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자신의 젊은 시절 닮은 김일성에 주목하다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④ 동북항일연군의 활약
한겨레 노형석 기자기자블로그
1969년 10월1일 신중국 선포 2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북한 당정 대표단을 인솔하고 베이징을 방문한 최용건(당시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회 위원장·사진 맨 왼쪽)과 천안문 성루의 접견실에서 환담하는 마오쩌둥(맨 오른쪽).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지낸 최용건은 북만주 지역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 중 한명이었다.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④ 동북항일연군의 활약

연재글이 몇 편 나가자 평소 알고 지내던 분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받았다. “김일성이 가짜가 아니냐”가 제일 많았다.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얼버무려 버렸다. “형편없는 ×” 이라고 말하는 가까운 친구도 있었다. “형편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너나 나나 알 길이 없지만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킨 건 사실이다. 지금 우리 정도면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 그전에 뭘 하던 사람인지, 21세기에 손자까지 세습하고도 당장은 멀쩡한 이유를 궁금해할 때도 된 것 같다”고 하자 더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1938년 봄, 중국의 국공합작으로 일본과의 전쟁이 본격화되자 전시수도 충칭과 중공(중국공산당)의 홍색 근거지 옌안이 뉴스의 초점으로 등장했다. 서방세계의 언론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기자들을 중국으로 파견했다. 충칭도 충칭이지만 마오쩌둥과 인터뷰를 하겠다며 옌안을 방문하는 외신기자들이 줄을 이었다. 이런 기회를 마오쩌둥이 놓칠 리 없었다. 당 선전부에 합동 기자회견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마오쩌둥은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은 발언권도 없어야 한다”는 명언을 남긴 사람다웠다. 신임 중앙당교 교장 리웨이한(李維漢)에게 1931년 9·18 사변 이후 동북에서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벌여온 항일유격대와 동북항일연군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 보라고 지시했다.

이 사람 저 사람 통해 말로만 들은 것 외에는 변변한 자료가 있을 리 없었다. 실망한 마오쩌둥은 몇년 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구국시보>(救國時報)를 발행했던 우위장(吳玉章)이 동북에 가서 현지 조사를 마치고 동북항일연군의 활약을 상세히 보도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듣자 우위장의 거처를 찾아갔다. 후일 최고인민법원장과 부총리, 당 부주석 등을 역임한 둥비우(董必武), 마오쩌둥의 스승이었던 쉬터리(徐特立), 신중국 사법제도의 틀을 짠 셰줴짜이(謝覺哉), 전인대 부위원장 린보취(林伯渠)와 함께 옌안의 다섯 원로(延安五老)로 추앙받던 우위장은 마오쩌둥을 앉혀놓고 동북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근 1주일간 설명했다.

토굴로 돌아온 마오쩌둥은 우위장이 챙겨준 동북 관련 자료들을 꼼꼼히 살폈다. 동북에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귀에 익숙한 이름도 있었지만 처음 들어보는 조선인들도 많았다. 특히 양징위와 함께 자주 거론되는 김일성에게 관심이 갔다. 하는 짓이 자신의 젊은 시절과 그렇게 비슷할 수가 없었다. 1927년 9월, 34살 때 고향에서 폭동을 일으킨 마오쩌둥은 100여명을 끌고 산속에 들어가 근거지를 건립한 적이 있었다.

1937~38년은 동북항일연군의 전성기였다. 1937년 8월20일, 항일을 촉구하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총사령관 양징위(楊靖宇) 명의의 포고문. 당시 김일성의 유격대도 1로군 소속이었다.

국공합작기 중공에 관심 쏠리자
외신과 회견 준비하던 마오쩌둥
동북지역 유격대 자료 검토하다
자주 언급된 김일성에 관심보여

마오쩌둥이 활약 높이 평가했던
동북항일의용군 영수 양징위
퉁창잉 소개로 김일성과 교분
김, 왕칭 지구 정치위원에

‘항일유격전쟁의 전략문제’(抗日遊擊戰爭的戰略問題) 집필에 들어간 마오쩌둥은 1938년 5월 말, <해방>(解放) 잡지 41호에 글이 실리자 기자들을 만났다.

기자들 앞에 나선 마오쩌둥은 거침이 없었다. 특히 미국 기자들을 잘 다뤘다. 1948년 동북서점에서 출간한 마오쩌둥 선집 424쪽에 마오쩌둥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다. “산속에 근거지를 건립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현재 장바이산(長白山)과 타이항산(太行山) 등에 근거지가 건립됐고 다른 지역에도 항일근거지가 건립 중이다. 이 근거지들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될 유격전쟁을 지지하는 항일전쟁의 보루가 될 것이다.”

미국 기자가 “방금 장바이산을 얘기했다. 동북3성 항일유격대가 중공의 지휘를 받느냐”고 물었다. 마오쩌둥은 주저하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우리는 동북의 항일의용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예를 들면 의용군 영수 양징위(楊靖宇), 자오상즈(趙尙志)와 조선인 이홍광(李紅光), 황푸(황포)군관학교 교관 출신 최용건(崔庸健)을 비롯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지휘관들이 우리 당원이다. 그들의 단호한 항일정신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난을 이기며 이룬 전적은 누구도 부인 못한다. 다들 그렇지만 양징위는 소련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 같은 사람이다.” 이어서 조선인 혁명가들과의 연합도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동북은 민족간의 연합에도 성공했다. 동북은 공산당원 외에도 여러 파벌과 단체들이 섞여 있는 곳이다. 그들은 이미 항일이라는 공동의 목표로 단결했다.”

마오쩌둥은 1945년 4월에 발표한 ‘논연합정부’(論聯合政府)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1931년 9월18일 선양(瀋陽)을 점령한 일본 침략자는 불과 수개월 만에 동북3성을 점령했다. 국민당 정부가 저항을 포기하자 3성의 인민과 애국적인 군인들이 국민당의 정책을 무시하고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협조하에 항일의용군과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해 용감한 유격전쟁을 전개했다. 이들의 유격전쟁은 날이 갈수록 규모가 커졌다. 도중에 수많은 어려움과 좌절을 겪었지만 적에게 소멸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미국 언론의 효과는 엄청났다. “중국공산당과 동북3성 항일유격대가 긴밀한 관계”라는 소식이 처음 보도되자 세계가 진동했다. 양징위가 우위장에게 보낸 편지도 공개했다. “그간 구국시보는 동북의용군에 관한 소식을 많이 보도했다. 내용이 모두 사실이다. 우리는 당파를 가르지 않고 신앙을 묻지 않는다. 항일을 하겠다면 누구도 거절한 적이 없다.” 지금은 중국 천지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이때부터 양징위라는 낯선 이름이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양징위는 김일성과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안후이(安徽), 지린(吉林), 랴오닝(遼寧)에 동상과 많은 흔적을 남긴 퉁창잉(童長英. 1907~1934)이 김일성에게 양징위를 처음 소개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퉁창잉은 지난 1000년간, 대과(大科) 급제자를 줄줄이 배출한 안후이의 전형적인 수재였다. 그것도 “천하의 문장은 퉁청(통청)에 있다”(天下之文其在於桐城乎)며 기개를 뽐내던 퉁청 출신이었다. 나이는 김일성보다 다섯살 위였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퉁창잉은 어릴 때부터 교사가 꿈이었다. 모친은 “밥은 굶어도 자식 교육은 시켜야 된다”는 남편의 유언에 충실했다. 일년 열두달 남의 집에 가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아들을 사숙에 보냈다. 퉁창잉은 6개월 만에 사숙을 때려치우고 소학교 문턱을 밟았다. 열네살 때 사범학교에 들어갔지만 성의회 의원들의 뇌물수수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체포령이 내리자 상하이로 나와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중공 창당 3년 뒤였다. 다시 고향에 돌아가 학생시위와 수업거부를 주도했다. 파업과 시위 선동으로 날을 지새웠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관비유학생에 무난히 합격해 일본 유학을 떠났다. 열일곱살 때였다. 들어가기 힘들기로 소문난 도쿄제일고등학교와 도쿄제국대학도 퉁창잉에겐 문턱이 낮았다.

1940년 2월23일 양징위는 지린성 멍장현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했다. 일본군이 중국 민족영웅 양징위의 시신을 옮기는 장면을 그린 후대 화가 후티린(胡悌麟)과 자디페이(賈滌非)의 합작 유화. 1984년 중국 전국미술전람회에서 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1928년 가을 학업을 때려치우고 귀국한 퉁창잉은 상하이에서 반제대동맹(反帝大同盟)을 결성해 조직력을 과시한 뒤, 다롄(大連)으로 향했다. 다롄에는 일본인에게 고용된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았다. 일본인 광산주의 횡포에 맞서 파업 중이던 푸순(撫順)탄광 광부들을 통해 양징위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퉁창잉은 도시보다 더 험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1932년 중공 동만(東滿)특위 서기 자격으로 동만주에 와서 김일성과 함께 항일 무장투쟁에 발을 담갔다. 일부러 김일성이 있는 곳을 택했는지, 아니면 우연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소규모였지만 60여차례 일본군을 습격하고 무기와 탄약을 탈취했다.

1932년 11월, 김일성이 이끌던 안투(安圖) 유격대는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던 왕칭(汪淸) 항일유격대, 닝안(寧安) 항일유격대와 합병해 왕칭지구 항일유격대를 확대 개편했다. 동만지구 특위 서기 퉁창잉은 김일성을 정치위원에 추대했다. 퉁창잉은 양징위와 접촉이 빈번했다. 만날 때마다 김일성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1933년 겨울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토벌은 이듬해 봄까지 계속됐다. 34년 3월21일, 일본군이 퉁창잉의 근거지를 포위했다. 포위망을 빠져나온 퉁창잉은 질병이 완치되지 않은 조선 여인 최금숙(崔今淑)이 눈에 들어오자 “우리가 적들과 싸우는 동안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당부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자 최금숙을 등에 업었다. 보름달이 밝았지만 눈이 겹겹이 쌓인 산중이라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실탄이 떨어지고 체력이 쇠진해 눈밭에 쓰러진 채 최금숙과 함께 동사했다. 일본군들은 국경을 초월한 남녀 혁명가의 시신에 총알을 난사했다. 장시(江西)성 동남부 루이진(瑞金)에서 장제스의 토벌에 시달리던 홍군이 장정을 시작하기 6개월 전이었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기사등록 : 2014-02-17 오후 08:12:48 기사수정 : 2014-02-17 오후 11: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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