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9월, 베이징을 방문한 북한 대표단의 김일성(오른쪽 둘째부터), 최용건 일행이 회담장에서 부총리 천윈(맨 왼쪽부터), 마오쩌둥, 류사오치, 리푸춘과 환담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당시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 이주연. 1945년 가을, 동북에 온 천윈은 국민당과의 일전을 앞두고 북한을 후방기지로 삼기 위해 평양의 김일성을 찾아가 승낙을 받았다. 이때 시작된 두 사람의 우의는 죽는 날까지 계속됐다. |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⑥ 중공의 신임얻은 조선인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총참모장이던 강신태(왼쪽)가 김일성과 함께 찍은 사진. 우리에겐 강건이란 별명이 더 익숙하다. 경북 상주의 빈농 출신인 강신태는 열여섯살 때부터 김일성을 따라다니며 항일 유격전을 벌였다. 국공전쟁초기, 중공의 연길 지구 사령관·서기였던 강신태는 동북의 토비 소탕에 큰 공을 세워 중공이 민심을 얻는 데 기여했다. 그는 한국전쟁 때 고향 부근인 안동에서 32살로 전사했다. |
3개 사단을 북한에 넘겨준 것은
동북지역서 중공과 함께 싸웠던
항일연군 내 조선인들 때문이다 연군 2방면군을 이끌던 김일성은
조선인 출신 간도특설대와 싸우다
소련으로 건너가 최용건·김책과
조선인의 단결·통일을 주장했다 일본 항복 뒤 국공내전 기운 돌자
국민당은 동북지역에 진을 쳤고
이에 놀란 중공은 김일성을 찾았다 1935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동북의 항일세력들은 연합을 모색하다 ‘동북항일민주연군’을 출범시켰다. 도끼와 곡괭이를 비롯해 각양각색의 무기로 무장한 20여만의 대오 중에는 만주 벌판과 밀림 속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선혈을 뿌린 조선 출신 지휘관이 유난히 많았다.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길림성 반석(磐石)까지 와서 항일유격대를 만들고 지휘했던 동북항일연군 1군 참모장 이홍광(李紅光)을 비롯해 경남 합천 출신 박한종(朴翰宗)과 경북 안동 출신 유만희(柳萬熙), 경북 선산 출신 허형식(許亨植)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 외에도 황옥청(黃玉淸), 마덕산(馬德山), 서해광(徐光海), 장흥덕(張興德), 오옥광(吳玉光) 등 일일이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출신 지역도 경기도, 경상도, 함경도, 평안도 등 한반도 전역을 망라했다. 1939년 10월 7만5천명을 투입한 일본군의 대규모 소탕작전이 시작되자 5군 지휘관 저우바오중(周保中)과 6군의 리자오린(李兆麟)은 장기투쟁을 견지하기 위해 소련 경내로 철수할 준비를 했다. 이 와중에도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안투(安圖), 옌지(延吉), 둔화(敦化) 일대에서 일본군과 유격전을 펼쳤다. 특히 40년 3월25일 허룽(和龍) 전투에서는 토벌대 200여명을 몰살시키고 기관총 여섯정과 소총 100여개를 노획해 재무장에 성공했다. 해가 바뀐 뒤에도 제2방면군은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허점만 보이면 산에서 내려와 부락과 기차역을 습격해 일본인 장교 두 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일본 관동군은 만주군 중에서 조선 출신들로만 구성된 특설대를 편성해 제2방면군만 전담케 했지만 전과는 신통치 않았다. 11월이 되자 전세가 악화됐다. 김일성은 16명의 유격대원을 이끌고 훈춘(琿春)과 왕칭(汪淸)을 거쳐 중-소 국경을 넘었다. 29살 때였다. 김일성은 타고난 정치가였다. 소련 경내에서 열린 동북항일연군회의에 남만지역 대표로 참석하기 직전, 북만지역에서 활동하다 건너온 김책(金策)과 최석천(崔石泉·최용건)을 설득해 조선인들의 단결과 통일을 실현시켰다. 회의에 참석해서는 “동북항일연군의 독립과 자주원칙을 견지하자”는 저우바오중의 주장을 지지했다. 평북 용천에서 김일성보다 12년 먼저 태어난 최용건은 중국인이나 다름없었다.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이 평북 정주에 세운 오산학교를 마치고, 중국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에 있는 윈난 강무당(講武堂)과 광둥성 광저우의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차 국공합작의 산물인 북벌전쟁에 참전했고, 저우언라이와 주더, 허룽 등이 난창(南昌)에서 일으킨 무장폭동에도 참가한 군사전문가였다. 베트남의 보응우옌잡, 중국의 주더와 함께 윈난 강무당이 배출한 세 명의 군사가 중 한 사람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김책도 마찬가지였다. 1930년 11월, 27살 때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 7년형을 선고받아 명성을 떨친 이래, 중공 지하조직의 도움으로 풀려나자 항일투쟁에 뛰어든 전형적인 무장투쟁의 신봉자였다. 나이는 김일성보다 여덟살 위였다. 김책과 최용건은 동북시절 같은 항일연군이긴 했지만 워낙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보니 김일성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소련에서 김일성을 만나자 문중의 종손처럼 애지중지했던 것 같다고 말하는 분이 있다. 탁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련에 둥지를 튼 동북항일연군은 코민테른의 동의를 거쳐 국제여단(88여단)을 창설했다. 여단장은 저우바오중, 부여단장과 정치위원은 리자오린이었다. 국제여단에도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이 많았다. 최용건은 여단 참모장과 중공의 동북지구당 서기를 겸했다. 국제여단의 조선인들은 행운아였다. 동북에 남아 있던 항일연군의 지휘관들은 중국인이나 조선인 할 것 없이 일본군의 토벌에 의해 거의 전사했다. 1955년 중국이 계급장을 수여할 때 받은 이는 소장 두 명이 고작일 정도였다. 동북의 항일투쟁 기간이 내륙보다 길었고, 동북과 소련의 밀접한 관계를 우려한 탓도 있었지만 생존자가 워낙 드물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중국에 남아 있었다면, 중장 정도는 충분했다는 기록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1945년 8월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국제여단의 조선 출신 간부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소련을 떠났다. 일부는 소련 적군을 따라 한반도의 38선 이북으로 향했다. 강신태(姜信泰·강건)와 박락권(朴洛權), 최광(崔光) 등은 동북의 조선인 밀집지역에서 조직을 재편하고, 중공의 팔로군과 함께 동북과 중국 전역을 국민당 통치에서 해방시키겠다며 동북으로 들어갔다. 승전국이 된 중국에는 그간 잠복해 있던 내전의 전운이 감돌았다. 전시 수도 충칭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담판을 벌였다. 10월10일 정치협상회의를 열어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 합의서에 서명했지만 두 사람 모두 합의서 따위는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장제스는 국민당 정예부대를 동북으로 진주시킨 뒤였고, 마오쩌둥도 한발 앞서 팔로군과 신사군을 동북으로 몰래 들여보낸 다음이었다. 1945년 9월 말 장제스와 회담하던 마오쩌둥이 중공 중앙위원 천윈(陳雲)을 충칭으로 불러 지시했다. “동북으로 가라. 근거지를 만들어라.” 천신만고 끝에 평양을 경유해 동북에 도착한 천윈은 국민당군의 기세에 놀랐다. 소련도 천윈과 팔로군을 냉대했다. 다시 평양으로 향한 천윈은 김일성을 찾았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