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0월1일 신중국 선포 2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북한 당정 대표단을 인솔하고 베이징을 방문한 최용건(당시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회 위원장·사진 맨 왼쪽)과 천안문 성루의 접견실에서 환담하는 마오쩌둥(맨 오른쪽).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지낸 최용건은 북만주 지역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 중 한명이었다. |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④ 동북항일연군의 활약
1937~38년은 동북항일연군의 전성기였다. 1937년 8월20일, 항일을 촉구하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총사령관 양징위(楊靖宇) 명의의 포고문. 당시 김일성의 유격대도 1로군 소속이었다. |
외신과 회견 준비하던 마오쩌둥
동북지역 유격대 자료 검토하다
자주 언급된 김일성에 관심보여 마오쩌둥이 활약 높이 평가했던
동북항일의용군 영수 양징위
퉁창잉 소개로 김일성과 교분
김, 왕칭 지구 정치위원에 ‘항일유격전쟁의 전략문제’(抗日遊擊戰爭的戰略問題) 집필에 들어간 마오쩌둥은 1938년 5월 말, <해방>(解放) 잡지 41호에 글이 실리자 기자들을 만났다. 기자들 앞에 나선 마오쩌둥은 거침이 없었다. 특히 미국 기자들을 잘 다뤘다. 1948년 동북서점에서 출간한 마오쩌둥 선집 424쪽에 마오쩌둥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다. “산속에 근거지를 건립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현재 장바이산(長白山)과 타이항산(太行山) 등에 근거지가 건립됐고 다른 지역에도 항일근거지가 건립 중이다. 이 근거지들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될 유격전쟁을 지지하는 항일전쟁의 보루가 될 것이다.” 미국 기자가 “방금 장바이산을 얘기했다. 동북3성 항일유격대가 중공의 지휘를 받느냐”고 물었다. 마오쩌둥은 주저하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우리는 동북의 항일의용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예를 들면 의용군 영수 양징위(楊靖宇), 자오상즈(趙尙志)와 조선인 이홍광(李紅光), 황푸(황포)군관학교 교관 출신 최용건(崔庸健)을 비롯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지휘관들이 우리 당원이다. 그들의 단호한 항일정신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난을 이기며 이룬 전적은 누구도 부인 못한다. 다들 그렇지만 양징위는 소련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 같은 사람이다.” 이어서 조선인 혁명가들과의 연합도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동북은 민족간의 연합에도 성공했다. 동북은 공산당원 외에도 여러 파벌과 단체들이 섞여 있는 곳이다. 그들은 이미 항일이라는 공동의 목표로 단결했다.” 마오쩌둥은 1945년 4월에 발표한 ‘논연합정부’(論聯合政府)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1931년 9월18일 선양(瀋陽)을 점령한 일본 침략자는 불과 수개월 만에 동북3성을 점령했다. 국민당 정부가 저항을 포기하자 3성의 인민과 애국적인 군인들이 국민당의 정책을 무시하고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협조하에 항일의용군과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해 용감한 유격전쟁을 전개했다. 이들의 유격전쟁은 날이 갈수록 규모가 커졌다. 도중에 수많은 어려움과 좌절을 겪었지만 적에게 소멸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미국 언론의 효과는 엄청났다. “중국공산당과 동북3성 항일유격대가 긴밀한 관계”라는 소식이 처음 보도되자 세계가 진동했다. 양징위가 우위장에게 보낸 편지도 공개했다. “그간 구국시보는 동북의용군에 관한 소식을 많이 보도했다. 내용이 모두 사실이다. 우리는 당파를 가르지 않고 신앙을 묻지 않는다. 항일을 하겠다면 누구도 거절한 적이 없다.” 지금은 중국 천지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이때부터 양징위라는 낯선 이름이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양징위는 김일성과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안후이(安徽), 지린(吉林), 랴오닝(遼寧)에 동상과 많은 흔적을 남긴 퉁창잉(童長英. 1907~1934)이 김일성에게 양징위를 처음 소개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퉁창잉은 지난 1000년간, 대과(大科) 급제자를 줄줄이 배출한 안후이의 전형적인 수재였다. 그것도 “천하의 문장은 퉁청(통청)에 있다”(天下之文其在於桐城乎)며 기개를 뽐내던 퉁청 출신이었다. 나이는 김일성보다 다섯살 위였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퉁창잉은 어릴 때부터 교사가 꿈이었다. 모친은 “밥은 굶어도 자식 교육은 시켜야 된다”는 남편의 유언에 충실했다. 일년 열두달 남의 집에 가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아들을 사숙에 보냈다. 퉁창잉은 6개월 만에 사숙을 때려치우고 소학교 문턱을 밟았다. 열네살 때 사범학교에 들어갔지만 성의회 의원들의 뇌물수수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체포령이 내리자 상하이로 나와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중공 창당 3년 뒤였다. 다시 고향에 돌아가 학생시위와 수업거부를 주도했다. 파업과 시위 선동으로 날을 지새웠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관비유학생에 무난히 합격해 일본 유학을 떠났다. 열일곱살 때였다. 들어가기 힘들기로 소문난 도쿄제일고등학교와 도쿄제국대학도 퉁창잉에겐 문턱이 낮았다.
1940년 2월23일 양징위는 지린성 멍장현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했다. 일본군이 중국 민족영웅 양징위의 시신을 옮기는 장면을 그린 후대 화가 후티린(胡悌麟)과 자디페이(賈滌非)의 합작 유화. 1984년 중국 전국미술전람회에서 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