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3 20:36 수정 : 2014.03.07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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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앳된 소년 같은 동북항일연군 북만 지역 지휘관들이 한자리에 모인 모습이다. 70여년간 묻혀 있다 발굴된 사진이다. 당시 항일연군 지휘관들은 20대 청년들이었다. 앞줄 한가운데 키 작은 사람이 북만 지역 항일연군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자오상즈다. |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⑤ 동만주 뒤흔든 민생단 사건
항일 무장투쟁은 김일성의 유일한 정치적 자산이었다. 중국도 김일성을 동북항일연군의 적자(嫡子)로 인정했다. 동북시절 김일성의 활동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1945년 이후 북한 땅에서 벌어진, 아직도 진행중인 황당한 일들을 이해하기 힘들다.
1962년 4월 동북항일연군 2로군 지휘관이었던 저우바오중(周保中)은 북한의 조선인민군 창설 30주년을 앞두고 소련 88여단에서 함께했던 김일성을 회상했다. “김일성은 훌륭한 군사간부였다. 고려인 동지 중에서 가장 우수했다. 그는 남만주 지역과 압록강 동쪽, 조선 북부지역에서 중요한 활동을 했다. 남만의 제1로군 간부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지휘관은 김일성이 유일하다. 양징위(楊靖宇)와 웨이정민(魏拯民) 동지가 희생당한 후 남만유격대를 계속 지휘할 사람은 김일성밖에 없었다. 당시 이 일은 남만주 전체의 문제였다.”
2개월 뒤 저우바오중은 베이징의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내용은 중국공산당 길림성위원회 당사연구실 편 <주보중항일구국문집>(周保中抗日救國文集) 하권(길림대학출판사, 1996) 400쪽에 실려 있다.)
그로부터 10년 뒤, 북한의 조선인민군 창설 40주년을 앞두고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직접 김일성에게 축하전문을 보냈다. “40년 전 귀하가 직접 창건한 조선인민혁명군은 전체 조선 인민과 민족의 희망인 혁명무장 역량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항일투쟁은 조선뿐만이 아니라 중국 인민의 항일 투쟁사에 영원히 기록될, 국제주의에 입각한 고귀한 지원이었다.”
김일성의 활약을 중공(중국공산당) 지도부에 처음으로 알린 사람은 중공 만주성위원회 길림성 동부지역 순시원이었던 양쑹(楊松)이었다. 양쑹은 중앙에 보고서를 보낼 때마다 김일성의 활약을 빼놓는 법이 없었다. 양쑹은 김일성의 이름을 중공 당보에 처음 등장시킨 사람이기도 했다. 동북을 떠나 코민테른 블라디보스토크 지부에서 우핑(吳平)이라는 가명으로 태평양지역 노동조합 중국부 주임을 역임한 뒤 중공의 항일 근거지 옌안에 돌아온 양쑹은 중앙선전부 부부장과 비서장을 겸하며 당 선전기관을 장악했다. 1941년 5월 중공 기관지 <해방일보> 초대 총편집에 취임하자 동북항일연군에 관한 소식들을 간간이 내보냈다. 2년 뒤인 43년 3월1일에는 24년 전 한반도를 만세 소리로 뒤덮었던 3·1운동을 소개하기 위해 동북항일연군 제4군 군장이었던 리옌루(李延祿)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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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시절 동지인 저우바오중 가족이 48년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 온천 요양소에서 김일성 일가와 찍은 사진. 뒷줄 왼쪽부터 김일성과 부인 김정숙, 저우바오중의 부인 왕이즈와 저우바오중. 앞줄의 두 아이는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과 저우바오중의 딸 저우웨이다. |
중공 정권 수립 뒤 흑룡강(헤이룽장)성 부성장과 전인대 상무위원을 지낸 리옌루는 명문장가였다. 82살 때 동북항일연군 시절을 회상하는 회고록 <지나간 시절들>(過去的年代)을 남의 손 빌리지 않고 집필할 정도였다. 조상 대대로 산둥 지방에 살았지만, 길림성 연길에서 태어난 리옌루는 어린 시절부터 조선인 친구들이 많았다. 자신보다 열세살이나 어린 자오상즈(趙尙志)를 항일연군 제3군장에 추대하고 4군을 창설하다시피 했다. 그는 동북을 떠난 뒤 모스크바, 파리, 베네치아를 거쳐 상하이에 ‘동북의용군 연락사무소’를 차리고 각계에 동북 출병과 동북항일연군 지원, 항일지사들의 동북 집결을 주장해 장제스를 곤혹스럽게 한 동북의 얼굴 격이었다. 문인 톈한(田漢)이 현재 중국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 가사를 쓸 생각을 한 것도 순전히 좌익 작가 샤옌(夏衍)을 통해 리옌루를 만난 다음부터였다.
양쑹의 청탁을 받은 리옌루는 ‘조선독립군운동’이라는 글을 <해방일보>에 기고했다. 동북항일연군 출신인 리옌루는 “무력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민족의 투쟁은 누가 뭐래도 무장투쟁이어야 한다. 외교나 민중계몽, 이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역설했다.
그는 엄동설한에 동북의 원시림에서 일본 군국주의와 너 죽고 나 죽자고 싸우면서 풀뿌리와 나무껍질의 맛이 뭔지를 아는 사람들, ‘설백혈홍’(雪白血紅), 곧 눈이 얼마나 희고 피가 얼마나 붉은지를 아는 조선 청년들의 무장투쟁을 소개했다. 거의가 조국과 중국의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벌판에서 쓰러져 간 식민지 청년들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에 이미 다 죽었고 살아 있는 사람은 김일성이 유일했다. 리옌루는 김일성을 “조선의 군사정치에서 견고하고 강력한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특히 ‘민생단’(民生團) 사건에서 보여준 김일성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중공 최고 지도부에서나 알던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중공 당원이라면 누구나 보던 당보에 처음 실리는 순간이었다. 민생단 사건과 인연이 있었던 양쑹이 당시 김일성의 활약을 잘 아는 리옌루에게 따로 암시를 줬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동북에 관한 한 리옌루의 글은 권위가 있었다.
동북항일연군의 적자로 인정
중공기관지에 김일성을 소개했다
리옌루는 “조선의 군사정치서
강력한 인물”이라며 높게 평가했다
항일투쟁에 대항한 민생단 색출에
억울한 희생자들이 속출했다
김일성이 민생단 자료를 불사르고
희생자들의 자녀들을 돌보자
그를 따르는 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훗날 정치적 자산이 된 사건이었다
국민당의 공세에 시달리던 장시(江西) 소비에트(1931~34년 중국 남동부 장시성에서 마오쩌둥이 주도해 세운 공화국으로,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토대가 됨) 시절,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는 ‘AB단 사건’과 흡사한 일이 30년대 초 동만주 지역에서 벌어진 것을 중공 일반 간부들은 리옌루의 글을 통해 알게 됐다. 그들의 머릿속엔 민생단 사건을 수습한 김일성의 이름이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1930년 여름 장시 소비에트 지역에 국민당의 특무조직인 AB단이 침투했다는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붉은 깃발 속에 스며든 첩자들을 숙청해야 한다”며 색출에 나섰다. 공포 분위기가 소비에트의 하늘을 뒤덮었다. 서로 죽고 죽이고, 수습이 불가능했다. 지주와 부농 1000여명은 물론이고 소비에트 공작 인원의 4분의 1이 AB단으로 몰려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원인도 모르고 죽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1932년 2월 동북의 조선인 밀집지역인 연길, 왕청, 혼춘, 화룡 일대에는 20여개의 항일유격 근거지가 있었다. 2만을 웃돌던 근거지 군민 중 1200명이 공산당원이었고 1300여명이 공청당원이었다. 일제는 한반도와 강 하나를 끼고 있는 이 지역을 애물단지 취급했다. 6000명에서 많게는 1만명까지 동원해 토벌작전에 나섰다. 동시에 경찰기구를 확충하고 무장자위단을 만들어 연변 지구의 식민통치를 강화했다. 항일유격 근거지 주위에 집단부락을 만들어 근거지를 봉쇄해버렸다.
머리 잘 돌아가는 조선의 친일 정객 몇 명이 일본 이민당국을 설득해 동만 지역의 항일무장세력에 대항할 민생단을 결성했다. 민족자치를 기치로 조·중 민족의 단결을 파괴하고 중·조 항일세력의 연합을 분열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민생단의 출현에 긴장한 중공 동만특위는 두 민족의 단결과 투쟁을 호소하는 것 외에는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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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웨이정민.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을 지냈으며 1941년 전사했다. 민생단 연루자들을 석방하고 관련 서류를 불사른 김일성의 해결책을 적극 지지했다. 김일성은 조선혁명에 큰 도움을 줬다고 그를 회고했다. |
민생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은 1932년 괴뢰정부 만주국이 모습을 드러내자 만주국이 내세운 5족협화(五族協和: 만주국을 구성한 만주족·한족·몽고족·일본인·조선인의 민족적 화합)에 장애가 된다며 6개월 만에 단체를 해산시켰다.
민생단은 해산됐지만, 중공 동만특위 수뇌부들의 머릿속에 민생단의 음영은 지워지지 않았다. 해산 얼마 후 성이 송(宋)이라고만 알려진 중공 연길현 비서 한사람이 일본 헌병대에 잡혀갔다. 일주일 뒤 석방되자 현 위원회에서 심사가 벌어졌다. 일단 잡혀간 사람이 별 탈 없이 풀려나면 의심을 받기 마련이었다. 심사를 받는 동안 일본 헌병대 통역 두명도 걸려들었다. 심문을 하자 송가는 일본 헌병대의 밀정이라고 실토했다.
송가에게 몽둥이찜질을 하자 자신이 민생단이라고 자백하며 20여명의 이름을 줄줄이 댔다. 20여명을 끌어다가 심문했다. 민생단원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중공 동만특위 간행물 <민주조선> 한글판에는 이런 내용이 실렸다. “민생단 주구들이 우리 당과 청년단에 침투했다. 부녀자와 아동들도 예외가 아니다. 틈만 있으면 민생단이 다 파고들었다. 적색구역과 백색구역, 적색 유격대 할 것 없이 민생단원투성이다. 토비와 농민들 중에도 민생단원이 있다.”
3년간 반민생단 투쟁의 광풍이 동만 지역을 엄습했다. 살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잡혀가서 민생단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사람도 많았다. 집회에서 기침 한번 했다가 민생단원에게 암호 보낸다고 총살당하는가 하면 어제의 사형집행자가 오늘은 민생단원으로 둔갑해 형장으로 끌려갔다.
1933년 코민테른이 파견한 양쑹은 저우바오중을 통해 반민생단 투쟁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하얼빈시 서기 웨이정민을 동만 지역에 급파했다. 연길에 도착한 웨이정민은 회의를 소집했다. 참가자 26명 중 반 이상이 조선족이었다. 동북 인민혁명군 산하부대 정치위원 회의도 열었다. 김일성 등 11명이 참석했다. 임의로 체포, 구금, 살인을 불허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중국 쪽 사료를 보면, 이 과정에서 김일성의 활약이 특히 도드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일성은 민생단 사건에 마침표를 찍었다. 마안산(馬鞍山)에 감금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던 민생단 혐의자 100여명을 석방해서 항일연군에 편입시키고, 그들에게 누명을 씌운 민생단 자료를 불살라 버렸다. 웨이정민도 동의했다.
김일성은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의 자녀들을 목욕시켰다. 그의 품 안에 넣고 다니던, 엄마가 삯바느질해서 모아뒀다가 죽기 전에 준 돈으로 옷을 만들어 입혔다. 여기저기서 ‘어버이 수령’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김일성도 “평생 제일 잘한 일이 육문중학 들어간 것과 민생단 자료 불살라 버린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