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들어가며

思美 2015. 9. 8.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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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별기획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들어가며

 

 

나는 1964년 겨울 어느 아침 9시 42분 발 ‘재건호’열차를 타고 대구역을 떠났다. 서울 가는 기차는 ‘청룡호’ ‘비둘기호’ 등도 있었지만 ‘재건호’가 당시는 최고의 쾌속 열차로서 5시간 만에 서울까지 가기 때문에 운임은 좀 비쌌지만 인기가 많았다. 그 후부터 나의 20여 년 객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삶이 어려울 때면 항상 고향 생각을 했다. 부모님 생각도 하고 친구 생각도 하고 우리 동네 생각도 하였다. 집이 너무 그리우면 우체국에 가서 집에 전화도 했다. 하지만 요금도 비싸고 신청하고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방학 때 기차가 김천쯤 오면 벌써 가슴이 울렁거린다. 당시는 열차가 설 때마다 그 도시의 이름을 마이크로 크게 외친다. “대-구”하고 역무원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기차에서 내릴 때의 그 기분은 뭐라고 우쭐대고 싶은 마음과 두근거리는 마음이 감격과 함께 몰려 오고 있었다.

이렇게 내 고향 대구는 힘든 청춘 시절 객지 삶의 원동력이 되는 곳이었다. 당시 대구시청은 ‘동인동 1가 1번지’였고 우리 집은 ‘동인동 2가 1번지’였다. 시내 한가운데에 우리 집이 있었다. 맞은편엔 작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장, 부시장 그리고 세무서 간세과장 관사가 있었다. 옆집은 대구일보 사장댁. 집 뒤의 큰길을 건너면 도지사, 경찰국장 그리고 전매청장 관사가 있었다. 그리고 동네 한구석 빈자리에는 피란민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내가 살던 고향은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피어 있는 꽃 대궐도 아니고 소나무 밑에서 바다가 내려 보이는 언덕도 없었다. 꺾어 먹을 찔레꽃이나 물장구치며 송사리 잡을 개울도 없었다. 다만 집들과 길만 있었다. 방학 때 고향에 오면 콜타르를 칠한 적산 가옥들과 피란민들의 판잣집으로 채워진 골목길을 다니는 게 고향의 향내를 맡는 시간이었다. 비속한 영어, 엉터리 일본어가 섞인 동네, 물건, 놀이, 동무들 이름을 고향의 말로 착각하며 살았다. 방학 때 친구들과 어울려 ‘동문 시장 학사 주점’서 꽁치로 막걸리를 마시거나 ‘향촌동 묵돌이집’서 공짜 안주로 주는 번데기와 생고구마를 먹으며 타향서 쌓인 피로를 풀고 다시 출전하듯이 객지로 되돌아갔다.

객지 생활을 마치고 대구로 왔다. 맨 처음 찾아간 곳이 동촌 유원지였다. 어릴 때 우리 공장 직원들이 야유회를 가고 학교에서 소풍도 갔던 곳이어서 늘 생각하던 고향의 강이었기 때문이었다. 물은 예처럼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보트는 없어지고 오리 모양의 배들을 발로 저어 타고 다니고 있었다. 동촌은 이미 동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산소가 있던 신암동에도 가봤다. 측후소는 기상대란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고 무덤들이 있던 야산은 주택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내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던 고향의 사진이 한 장 한 장씩 찢겨져 가고 있었다. 반월당에서 서쪽으로 가면 오른쪽에 고려예식장이 있고 왼쪽에 적십자병원이 있었다. 그 길은 야산에 막혀 끝이 났다. 야산 아래는 개울물이 흐르고 작은 다리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그 작은 시골길이 달구벌대로라는 거창한 이름답게 아주 큰 신작로가 되어 있었다. 대구는 타향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대구역이 아주 쇠퇴하고 소멸되기 직전인 것이었다. 역이 죽으니까 상가 판도들도 다 바뀌어 있었다. 그 유명한 향촌동, 거기서도 이름을 날리던 ‘황금마차’, ‘흑장미’, ‘주부센터’, ‘관광열차’ 등의 명문 음식점이나 주점들은 없어지고 겨우 싸구려 식당들만 상가를 꾸려 가고 있었다. 나의 고향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대구 사람들은 파괴의 시민이다. 조선시대까지 쓰고 있던 대구의 읍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물론 ‘박짝대기’로 별칭되던 박중양(경상감사) 씨가 그랬다고는 하지만 시민들의 묵인 없이는 그게 정말 혼자 힘으로만 가능했을까? 이제 대구 읍성은 그 이름만 살아 있다. 동성로, 서성로, 북성로 그리고 남성로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도 비켜간 파괴의 귀신을 대구는 시민들 스스로가 폐허로 만들고 말았다. 어떤 이는 그것이 대구의 발전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서울, 평양, 대구 삼대 도시였던 내 고향이 이렇게도 찌부러들 수가 있단 말인가? 대구에만 있던 고등법원이 부산에도 생기고 약령시장도 서울의 경동시장에 비교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삼성을 탄생시키고 키워주고도 덕 하나 본 것이 없는 도시. 그러기 위해 겨우 한 일이 대구의 파괴였단 말인가! 창조도 할 줄 모르면서 부술 줄만 아는 시민. 객지에서도 내가 그렇게 자랑하던 고향 사람들의 생각이 겨우 이러한 것을 보며 그동안 나 혼자의 고향 짝사랑에 눈물이 난다.

앞으로 나는 본란을 통해서 대구 정사에 없는 야사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이 내 잃어버린 고향을 되찾는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옛날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변해 버린 고향에 대한 푸념으로 투덜대지는 않겠다. 앞으로 잘하자는 이야기를 쓰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구가 ‘수구꼴통의 도시’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게 다 대구를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심지어 이런 말에 대구 사람들 자신도 대꾸를 옳게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다. 대답할 사람들은 다 서울로 가버리고 대구에 애정을 가지고 기억을 더듬을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다. 나는 내 어린 시절부터 성장해서 장년이 될 동안 보고 들은 내 고향의 이야기를 느낀 대로 말하려고 한다. 나중에 나보다 더 기억이 좋고 똑똑한 이가 나와 나의 졸작을 기초로 하여 더 나은 대구 야사가 나오기를 기대하며 대구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새해부터 ‘권영재의 내 고향 대구’를 새로이 연재합니다. 권영재 씨는 대구 동인동에서 태어나 가톨릭대 의대를 졸업하고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대구정신병원 의무원장,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미주병원 진료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삽화를 맡은 조성호 작가는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 수묵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기사 작성일 : 2014년 12월 31일  

대구역.

 

대구역(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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