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3> 한일극장

思美 2015. 9. 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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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3> 한일극장

 

한일극장은 필자가 어릴 때 ‘문화극장’이라고 불렀다. 어른들은 ‘키네마극장’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아버지 말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 극장이 만들어졌는데 당시의 이름이 ‘키네마 구락부’였다고 했다. 키네마극장은 당시로서는 큰 건물이어서 시골에서 도시락 싸들고 구경을 하러 왔다고 한다. 당시 대구는 전국 3대 도시로 도시 구경도 할 겸 새로 생긴 큰 극장을 보기 위해 몰려왔던 모양이다. 이 극장은 한국전쟁 때는 이승만 대통령도 출입했던 영화관이다.

부수고 없애기 좋아하는 대구 사람들이 어떻게 한일극장은 지금까지 그대로 두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이 극장은 필자가 다닌 ‘중앙국민학교’ 옆에 위치해 기억에 많이 남는 건물이다. 그 극장 옆에는 대구소방서가 있었고, 두 건물의 골목 사이에는 ‘국일’이라는 국밥집이 있었다. 아버지가 새벽에 우리 형제들을 데리고 체력 단련시킨다고 아침 구보를 한 뒤 이 집에서 국밥을 먹기도 했다. 원래 국밥집은 국에 밥을 말아서 주는데 이 집에는 국과 밥을 따로 주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국일따로’라고 불렀다.

한일극장 앞에는 이름 모를 시커먼 고목 한 그루가 있었는데 조선시대 사형수들의 교수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 나무는 어쩐지 색깔과 크기가 영 내키지 않는 나무였다. 하지만 그 국밥집은 불티나게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음식 맛이 좋은 이유도 있었지만 식은 밥을 국물에 덤벙 말아주는 여느 국밥집보다 이 집은 정갈하게 갓 지어 낸 이밥을 국과 함께 따로 내어 오는 정성에 호감을 샀다. 따로 국밥집이 유명해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정부가 대구로 옮겨왔다. 서울의 문화극장도 대구로 옮겨 ‘국립극장’이 되었다. ‘팔도조선’ 사람들이 대구로 다 모여들었으니 그다지 넓지도 않은 대구가 얼마나 붐볐을 것이며 먹을 것이 얼마나 귀했을까 상상이 된다.

국일따로는 원래 막걸리를 파는 집이었는데 주인 인심이 후해서 술국으로 소고기 국물을 서비스하였다고 한다. 배고픈 피란민들이 품팔이하고 번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잔술에 고기 국물이 들어가니 밥 생각이 절로 나 술 마시다 밥까지 청해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재보다 잿밥’이라고 술 손님들에게 막걸리보다 국밥이 인기가 있어 술보다 밥이 주가 되는 형태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도 어떤 국밥집은 식은 밥을 국에 말아 주는 무성의한 집이 있는데 당시에는 모든 국밥집이 다 그랬었다. 그러나 국일따로에서는 국과 밥을 따로 주었다. 아마도 주인 되는 분이 양반의 기질이 있은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전장에서 군인들은 총탄에 죽어나가지만 후방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영화나 연극을 보며 고단함을 달랬다. 이런 풍조는 어느 나라에서나 전쟁 중에 있는 생활방식이다. 그렇게 일하면서도 쉬며 놀아 주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국립극장도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대구 시민과 피란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역할을 했다. 국립극장은 영화를 주로 상영하였지만 가끔 당시 발음으로는 ‘바라야데 쇼’라고 하는 것도 공연하였다. 아마 ‘버라이어티 쇼’였을 것이다. 이 쇼는 문자 그대로 다양한 장르를 공연하였다. 먼저 신파 조의 연극을 하면서 중간 중간 내용과 비슷한 유행하는 가요를 부르는데 미국의 뮤지컬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 신파 연극이 끝나면 아름다운 무희들이 나와 다리를 번쩍 올리는 춤을 추는 미국식 쇼를 하였다. 신파 연극과 뮤지컬 쇼까지 하니 버라이어티 쇼라고 한 것 같다. 전쟁 통에 전국으로 돌아다니지 못하는 유랑극단이 일본식과 미국식을 결합하여 한극장에서 붙박이 공연을 하였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국립극장은 전쟁이 끝난 뒤 서울로 올라가고 다시 ‘한일극장’이 되었다. 전쟁 전후 수많은 연예인들이 이 극장에 드나들었다. 이들은 쇼가 끝나면 극장 바로 옆에 있는 국일따로 국밥집으로 가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이곳에 드나들던 김승호, 허장강, 황해, 박노식, 백년설, 고운봉, 송해, 구봉서 등 기라성 같은 연예인들은 전쟁 후 대구를 떠나서도 국일따로 국밥 맛을 잊지 못해 전국으로 전파시켰다.

전쟁을 계기로 한일극장과 더불어 피란민과 연예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싸구려 국일국밥은 후에 대구의 향토음식이란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여하튼 특별한 음식도 아닌 소고기 국밥이지만 유명해지니까 너도나도 ‘원조 국일 국밥집’을 열었다. 이들은 우리 집이 최초로 따로 국밥집을 시작하였다고 큰소리친다. 필자가 경험한 최초의 따로 국밥집은 국일 국밥집 하나뿐이다. 필자가 민속학자는 아니어서 그들의 주장 가운데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그런 종류의 국밥집이 몇 집 살아남았다는 것은 필자에게 소중한 추억이 되고 있다. 게다가 옛날에는 ‘키네마극장’ ‘궁디극장’(국립극장의 애칭), 또는 문화극장이라고 불리던 한일극장이 한때 문을 닫았다가 다시 문을 연 것에 대해 큰 박수를 보낸다. 길 이름도 한일로가 있을 정도로 한일극장은 필자의 문화관을 형성케 한 추억의 공간이었다.

기사 작성일 : 2015년 0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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