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4>천막극장

思美 2015. 9. 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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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4>천막극장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 끝났다. 전쟁 동안 대구는 박격포 몇 발 떨어진 것 외의 큰 피해는 없었지만 온갖 ‘팔도 조선사람’들이 다 모여들어 북적거리는 통에 온 시내가 장터였다. 사람 사는 동네 모양새를 잃었다. 하늘에는 온갖 종류의 비행기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길에는 전장으로 향하는 군인들의 행군이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 군인 외에도 얼굴이 흰 군인, 검은 군인들이 주민들처럼 동네를 돌아다녔다. 미군부대 철조망을 넘나드는 피란민 아이들, 진한 화장에 껌을 씹으며 ‘헬로’를 외치는 누님(?)들, 미군이 던져준 껌이나 비스킷 주워 먹는 동네 아이들. 이런 풍경이 당시 대구 시내 중심가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철없던 필자는 사람 사는 동네 모습이 원래 그런 줄 알고 그 비극적인 혼돈스러움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 기이한 풍속에 익숙해지고 때로는 즐겁기도 했다. 슬픈 사실은 어른이 된 지금에도 그런 비극적인 옛 풍경들이 그리운 추억으로 각인돼 어떤 때는 다시 한 번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도 있다. 인격의 한 모퉁이를 찌그러뜨린 전쟁의 살벌한 풍경이 그리운 인간, 그런 마음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성장하여 오늘날 이 나라의 어른 행세를 하고 산다.

당시 대구는 별 문화 시설이 없었던 탓에 극장은 운영이 잘됐다. 문화극장, 대구극장, 송죽극장, 자유극장 등은 성업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후발 주자인 아카데미극장, 제일극장, 아세아극장 등도 운영이 잘되었다. 하지만 그런 일류 극장들은 돈푼깨나 만지는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공장직원들은 회식 때 사장인 필자의 아버지가 ‘기마에’(일본어로 큰마음)를 한 번 크게 쓰면 단체로 극장을 가곤 했다.

입장료가 싼 소위 ‘이류 극장’은 호주머니가 가벼운 소시민의 문화적 허기를 채워주었다. 그래서 일류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가 하루빨리 이류 극장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영화 팬들이 많았다. 신기하게도 이류 극장들은 시장 부근에 하나씩 있었다. 아마 시장은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며 또 부근에는 큰 동네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칠성시장 부근에 신도극장과 신성극장이 있었고, 남문시장에는 대한극장과 대도극장이 있었다. 봉덕시장 쪽에는 남도극장, 교동시장에는 국제극장 등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돈 떨어지고 담배 떨어지고 애인마저 떨어진’ 불쌍한 소시민에게도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소위 ‘천막극장’(가설극장)이 그런 사람들을 맞이하는 곳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육군중앙극장’(걸뱅이극장)을 가도 되겠지만 그곳에 가면 정말 자신이 거지가 된 것 같아서인지 어른들은 가지 않았다. 더구나 여자들은 그런 위험하고 지저분한 극장에는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런 틈새에 나타난 것이 바로 천막극장이었다.

당시만 해도 대구는 시골 모습이어서 시내라고 해봐야 곳곳에 빈터가 많았다. 변두리인 신천 강변이나 동인동 뚝방 동네는 말할 것도 없고 중심가인 시청 옆, 칠성시장 입구, 대구백화점 앞에도 공터가 많이 있었다. 바로 이런 곳에 천막극장이 들어서 순회공연을 하였다. 천막극장은 마치 서커스 패거리처럼 말뚝을 몇 개 박고 천막을 뒤집어씌운 뒤에 손님을 받았다. 천막극장은 건물이 있는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와 다르게 ‘검사와 여선생’과 ‘며느리의 설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같은 신파조의 내용들이 많았다. 몹시 가난한 사람들은 천막극장에도 못 들어가고 천막 밖에 돗자리를 깔고 몰려 앉아 영화 속의 대사에 귀를 기울였다. 나쁜 놈이 대사를 하면 천막 안팎에서 동시에 욕하는 소리가 합창으로 울렸다. 슬픈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천막 안에서도 울고 밖에서도 울었다. 소위 ‘줄탁동시’인 셈이었다.

옛날의 어린이들은 과외를 하지 않았다. 사람이 죽고 사는 판에 학교 공부 외는 관심 밖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온 동네 애들이 모였다. 함께 운동도 하고 이야기도 하며 모여 놀았다. 이때 극장을 갔다 온 아이의 영화이야기가 최고의 인기였다. 말 잘하는 애는 그 자리에 모인 애들을 웃고 울렸다. 천막극장 안과 밖의 청중이 함께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필자도 남몰래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 추석 날, 가난한 친척 아주머니가 아이들과 필자를 데리고 천막극장에 갔던 적이 있었다. 요즘 칠성 꽃시장 동네였다. 철길을 건너기 전 바로 왼쪽에 가설극장이 있었다. 필자는 어렸지만 그런 분위기가 싫었는데 아주머니가 구경시켜준 영화 관람이라 불만을 참고 억지로 좋은 척하고 앉아 있었다. 외부와는 천막으로 둘러쳐져 있고 바닥은 맨땅이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가마니를 깔고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땅바닥에서 제기를 차는 애, 모여 노래 부르는 청년들, 어떤 청춘 남녀는 부둥켜안고 낄낄거리고 떠든다. 마치 남녀노소가 모여 깽판 치면 저런 분위기일 것이다.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마치 저승의 아수라장이 바로 저런 분위기일 것 같았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됐다. 조용하다가도 주인공이 고통받는 장면이 나오면 악당을 욕하느라 온 청중이 주먹을 휘두르며 욕을 한다. 아녀자들은 울려고 작정하고 온 듯 별 대수롭지도 않는 장면에도 눈물만 훔친다. 화면은 낡아 소위 ‘비 온다’고 하는 말로 표현되는 스크린에 흰 줄이 죽 죽 그어진 장면이 이어진다. 가끔가다 필름도 끊어져 쉬어가며 영화가 돌아갔다.

지금 생각해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데서도 웃고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전쟁 통에 가족이 죽고 굶주리면서도 자살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사람이란 먹고 잠자는 것 외에도 문화가 필수적이다. 연약한 게 인간이라지만 조건만 잘 조절해주면 잡초와 같이 억센 자생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게 인간인 것 같다.

기사 작성일 : 2015년 01월 22일  

송죽극장.

자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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