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2> 걸뱅이 극장 | |
대구역에서 나오면 오른쪽에 붉은 벽돌로 만든 공회당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KBS방송국과 강당, 그리고 각종 사무실이 있었다. 걸뱅이 극장은 공회당 지하에 있었다. 극장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설립 목적은 전쟁 중에 휴가 나온 군인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극장이었다. 그러나 민간인들도 표를 사면 입장시켜 주었다. 약삭빠른 사람은 5원인 입장권을 사지 않고 기도(입구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일본어)에게 입장료의 절반만 주고 들어가기도 했다. 걸뱅이 극장은 군인들이 주 고객이었지만 돈 없는 사람이나 꼬맹이들도 많이 드나들었다. 당시 시내엔 문화극장(키네마)과 송죽극장, 자유극장, 대구극장도 있었지만 프로그램에 따라 학생 입장을 제한하였다. 또 입장료가 비싸 학생들이 갈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해 걸뱅이 극장을 많이 이용하였다. 걸뱅이 극장은 이름 그대로 건물이 낡고 더럽고 분위기도 산만했지만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상영하는 프로그램은 대개 미국 영화였다. 가끔 쇼도 하고 한국 영화도 상영했지만 주로 미국 영화를 방영했다. 당시 한국 영화는 흑백이었는데 미국 영화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들이 많았다. 우리는 영어가 서툴러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눈은 황홀하였다. 그리고 영화는 미군을 거쳐 나오는 것이어서 우리나라 극장에서 개봉하기 전에 상영하였다. 심지어 걸뱅이 극장에서 상영되고 몇 년 뒤에 일반 영화관에 나오는 영화도 있었다. 영화의 대부분은 정의가 승리하는 권선징악의 내용이 대부분이었는데, 불멸의 서부영화 존 웨인 주연의 ‘역마차’, 게리 쿠퍼의 ‘베라쿠르스’ ‘하이눈’, 버트 랭커스터의 ‘진홍의 도적’ ‘OK 목장의 결투’ 등이었다. 미군부대서 그냥 흘러나와 우리말 더빙이나 혹은 문자 번역 없이 상영되었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 ‘변사’가 있었다. 그러나 변사도 영어를 모르기는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영화를 보면서 자기 맘대로 통역을 하곤 했다. 엉터리 변사는 영화 개봉 첫날, 주인공이 죽었다고 잘못 설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죽었다던 주인공이 화면에 다시 나오면 관객들은 변사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항의하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변사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 변사는 머리가 좋은지 말재주가 있는 건지 상영 횟수가 많아지면 여자 목소리, 남자 목소리 할 것 없이 정말 실감 나게 통역(?)을 해주었다. 실제 영화 내용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변사의 설명을 들으면 영화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화는 낡은 필름이 들어오는 탓에 화면이 비 오는 듯 흰 선이 죽죽 그어져 있었고 때로는 상영 중에 필름이 끊어지기도 했다. 어떤 때는 무슨 볼일이 있는지 변사가 통역하지 않고 어디를 갔다 오기도 해 관객이 고함지르며 불평을 하기도 했다. 주인공이 죽었다고 했다가 다시 살아나 다음 화면에 등장하면 관객들은 휘파람을 불며 야유를 했다. 이럴 때면 변사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죽는 거 봤냐?”며 뻔뻔스럽게 능청을 떨었다. 통역하지 않는다고 떠들면 “서부는 오줌 누지 않고 산단 말인가!” 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도 했다. 변사가 관객과 함께 이야기도 하고 번역도 하였으니 서로 혼연일체가 되어 보는 영화였다. 값이 싼 극장이어서 관객을 깔보는 건지 아니면 변사가 계급이 높은 군인인지 극장이 시끄러울 땐 통역 중에도 큰 소리로 “조용히 해”라며 협박에 가까운 꾸중을 하기도 했다. 걸뱅이 극장은 항상 만원이었다. 군인들은 물론 기차 통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구역을 중심으로 서쪽에서는 김천과 왜관, 약목, 신동, 지천에서, 동쪽에서는 경산과 영천, 금호, 하양, 청천, 고모에서 학생들이 기차 통학을 하였다. 등하교 시간에는 많은 학생들이 역전 광장에 모여들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간에 맞춰 집으로 갔지만 그중에는 일찍 집에 가지 않고 영화를 보고 가는 학생도 많았다. 당시 어른들은 걸뱅이 극장 같은 곳은 분위기가 좋지 않다며 자식들에게 못 가게 했다. 그러나 선생님이나 부모님들이 못 가게 하는 곳에서 영화를 본 친구는 다음 날 영웅이 되었다. 쉬는 시간이면 목에 힘을 주고 전날 본 영화를 친구들에게 설명해줬다. 당시에는 텔레비전은 물론 라디오도 제한된 시간에만 방송하던 시절이어서 영화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다. 7명의 악당을 단 혼자서 쏘아 죽이는 ‘하이눈’의 게리 쿠퍼를 비롯해 ‘OK 목장 결투’에서 보안관 와이어트 역으로 나오는 버트 랭커스터와 그 친구 닥터 홀리데이 역을 맡은 커크 더글러스, 인디언과 사투를 벌이며 종착역까지 달려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는 ‘역마차’의 존 웨인은 우리나라 배우 김진규, 허장강, 김승호, 최무룡보다 더 멋있고 정답게 느껴졌다. 거리에서 초콜릿이나 비스킷을 던져주는 고마운 미군 아저씨. 학교에서 우리에게 굶어 죽지 말라고 우윳가루를 주던 UN, 재미나는 영화까지 보여 주는 미군. 미군 막사가 있는 철조망만 넘어가면 산해진미가 쌓여 있는 군인부대 등 어린 우리에게 미국은 천국이었으며 그곳 사람들은 천사로 느껴졌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미국은 그런 좋은 사람들만이 사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필자는 그런 격동기를 거치면서 살아왔다. | |
기사 작성일 : 2015년 01월 08일 |
대구공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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