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5>동문시장

思美 2015. 9. 8.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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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5>동문시장

 

어떤 사람이 대구 본토박이인지, 시내 중심지에 살았는지를 알려면 “‘동문시장’을 아시나요?” 하고 물어보면 답이 나온다. 어떤 이는 시장의 위치가 시내 한복판에 있었던 걸 알게 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위치와 명칭이 서로 맞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전후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필자가 어렸을 땐 시내의 동쪽 끝이 동인4가 신천 뚝방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시청 부근에 대구 읍성의 동문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대구가 커지면서 동으로 뻗어나가 신천을 넘어 수성 면을 흡수하였다. 그 후 대구가 확장되면서 시청이 대구의 한가운데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동문시장이 대구의 중심에 있었지만 그 시절에는 동쪽에 위치해 그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동산병원의 ‘동산’도 동문시장보다도 훨씬 서쪽인데도 그런 명칭이 붙었다.

시내 판도가 바뀌자 동문시장은 위치로 봐 이름을 ‘중앙시장’이라고 바꿔 불러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중앙시장은 이미 따로 있어 개명할 수도 없었거니와 중구가 상가로 채워지고 주거 인구가 줄어들면서 시장은 쇠퇴해 결국 없어지고 말았다. 시장이 없어졌으니 토박이가 아닌 사람들은 볼품없는 조그마한 시장 하나가 시내에 있다가 그냥 소멸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 후에도 한동안 동문시장은 여느 전통시장과는 달리 고급시장으로 군림했었다.

시청 앞 우측에는 철도청 관사들이 모여 있었고 그 초입에는 시장, 부시장, 세무서 간세과장의 관사가 있었다. 길 건너에는 도지사, 경찰국장, 전매청장 등의 관사가 있었다. 관청으로는 중구청과 16헌병대(그전에는 101헌병대)가 있었다. 한국전쟁 때는 육군본부도 관사 지역의 끝에 있었고 나중에는 2군사령부가 되었다가 다시 이전했다. 이 지역은 관사 말고는 동인동과 공평동, 그리고 삼덕동의 부자들이 모여 사는 삼각지의 끝이었다. 동문시장은 이런 관사에 사는 사람과 부잣집 마나님들이 장을 보는 그런 시장이었다.

동문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은 여느 시장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많았다. 시장이 작아서인지 아니면 고급시장이어선지 모르겠지만 여느 시장처럼 난장판이 아닌 커다란 건물 속에 있었다. 요즘 들어 전통시장이 비가림 시설을 만들어 지붕을 덮었지만 동문시장은 그 시절 이미 돔 형식으로 지붕을 덮어 햇빛과 비바람을 막는 시설을 완비했다. 이처럼 동문시장은 작은 시장이었지만 파는 물건은 고급제품이 많았다.

그때 이미 반찬을 만들어 파는 가게가 시장에 있었다. 일본식이 남아서인지 상품으로는 연근조림, 게장 조림, 마늘종절임, 오이절임 등의 각종 ‘조림’과 ‘절임’ 류 등을 비롯해 다꾸앙(단무지의 일본말), 나라쓰게(절임 외를 정종 지게미에 담은 일본 음식) 등도 팔았다. 어물전에서는 여느 시장에서 볼 수 있는 꽁치, 고등어도 있었지만 긴따로(빨간 볼락의 일본어), 광어, 큰 새우, 주먹만 한 조개 등 그 당시로서는 희귀한 고급생선을 팔았다. 그 외 생활도구와 쌀 등의 곡물도 팔았다. 요즘으로 치면 자그마한 고급 마트라고 할 수 있겠다. 옷감이나 신발, 기타 생활필수품은 취급하지 않아 이런 물건은 칠성시장이나 큰장(서문시장의 옛 이름)에 가서 샀다.

필자는 동문시장 부근에서 태어났다. 조부모와 부모, 필자, 그리고 자식까지 4대가 해방 직후부터 60년 정도 이 동네에서 살았다. 우리 집은 관청과 관사 끝에 위치했는데 대구일보사와 그 사장 집, 영남반점, 그리고 성노당 책방(대구서 가장 유명했던 책 대여점) 등이 관가 동네의 ‘막창자 꼬리’처럼 이질적인 존재로 그들과 더불어 살고 있었다.

필자는 중앙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그전에는 현 동덕초등학교가 된 가교사에서 공부했다) 동문시장 앞으로 다녔다. 그래서 동문시장은 필자에겐 추억의 한 자락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우리 집은 공장을 운영해 식구들이 많아 비싼 동문시장은 가지 못했다. 모든 생필품은 칠성시장에서 장을 봤다. 어머니는 쌀만은 칠성시장에 가지 않고 동문시장 밖에 있는 ‘정 삼디기’(정삼덕 씨) 쌀집에서 샀다. 필자도 가끔 쌀을 사오는 심부름을 하곤 했다. 정 씨 아저씨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그 가게만을 이용했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동문시장 앞에 서서 “동문시장이 어디냐?”고 물었다. 요즘에는 큰 마트 부근에도 구멍가게가 있고 노점 과일장수가 있듯이 이 시장 바로 앞 역시 싸구려 생선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시장 건물 입구에는 육소간도 있었다. 그런 허름한 가게들이 시장을 잘 모르는 사람의 판단 착오를 일으키게 한 것 같다. 그 생선가게에는 필자와 같은 학년의 여학생이 있었는데, 걔를 만날까 봐 그 집 앞을 지날 때는 항상 빠른 걸음으로 다녔던 기억이 난다. 서로 말 한마디 섞은 적이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 더구나 예쁘지도 않은 계집애였는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1960년대, 방학 때가 되면 친구들이 동문시장 뒷골목에 있는 ‘돌체’라는 술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이 집을 드나들면서 동문시장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결국 우리 집도 이사를 갔고, 필자의 부모도 돌아가시고, 동네도 통째로 없어지고 말았다. 오랜 객지살이 후 이제 고향에 돌아와 사는 필자는 추억이 서린 그곳을 꿈에서나 볼 따름이다.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기사 작성일 : 2015년 01월 29일

동문시장 동원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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