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6>서문시장 | |
어른들 말로는 ‘신용의 덕’이라고 했다. 정부의 별 도움 없이 직조공장과 시장 상인과의 의리와 신용으로 재활에 성공한 것이다. 아무 조건 없이 공장에서 포목을 공급해준 덕택에 상인들은 재기할 수 있었다고 했다. 서문시장은 못을 메워 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삶터를 빼앗긴 용왕이 노해서 불이 자주 나는 걸까? 잦은 화재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서문시장은 여느 전통시장과는 다른 점이 많다. 시장 이름은 ‘큰 장’으로 불렸으나 그곳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러 품목을 다루지 않고 포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런 점이 불이 자주 나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서문시장은 거대한 포목시장이었다. 1960년대까지는 한강 이남의 도시 상인들은 서문시장에서 옷감이나 이불감, 혼숫감 등의 섬유제품을 사갔다. 서문시장의 이런 특징은 당시 우리나라의 2대 도시였던 대구에 직조공장이 많았기 때문이다. 서문시장 때문에 그런 공장이 많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은 산업 종류가 다양하고 그중에서도 전자산업이 주가 되지만 옛날에는 광산이나 직조가 가장 앞서 가는 산업이었다. 서울대 공대에도 1960년대 초까지 전자과는 없었고 우수한 학생들은 광산학과나 섬유공학과, 화공과를 지원한 것을 보면 당시 우리나라 산업의 분포도를 짐작할 수 있다. 한강 이남 거의 모든 지역에서 ‘큰 장’으로 섬유제품을 사러 왔다. 그러나 충청도나 경남은 경제 규모가 작아 주고객은 전라도 상인이었다. 부산은 1970년 초까지도 고등법원이 없어 대구로 재판을 받으러 왔다. 대구는 일제강점기 때 벌써 ‘미나까이’, ‘이비시아’, ‘무영당’, ‘반월당’ 등의 큰 백화점이 있었는데, 부산은 변변한 게 없어 겨우 ‘미화당백화점’ 정도가 있었다. 오늘날 거대한 도시가 된 부산도 그 당시까지만 해도 서문시장의 큰 손님은 되지 못했다. ‘전라도에 풍년이 들면 대구가 부자 된다’라는 말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주 사업이 농업이었고 전라도는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라도와 대구는 한배를 탄 정다운 친구였다. 전남 담양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광주에서 왔다”며 대나무 제품을 산더미처럼 짊어지고 가가호호 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부잣집에서는 죽제품 장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잠도 재워주었다. 대구 사람들은 그들의 말투가 재미있어 “광주서 왔땅게” 하며 놀리기도 했다. 그것은 친구끼리의 악의 없는 농담이었고 친한 표시였다. 그들이 대구 사람에게 “경상도 보리 문둥이”라고 해도 화를 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대구의 상품이 전라도로 팔려가니 그들은 주요 바이어로 대구 사람들에게 고마운 친구였다.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대구는 경제적으로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서울로 올라가 포목을 사기 시작했다. 대구에는 더 이상 광주리 장수가 오지 않았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고향 울산에는 조선과 화학제품 공장이 생겼고, 박정희 전 대통령 고향 구미에는 전자제품 공장이 들어섰다. 그러나 대구는 그 번영의 바람에 편승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직조’에서 ‘섬유’라는 이름으로 바뀐 공장만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변화를 싫어하고 잘 적응하지 못하는 대구 사람들의 고집과 둔함, 그리고 정치적인 좋은 환경을 이용하지 못한 재치의 부족으로 대구는 다른 도시에 비해 뒤처지기 시작했다. 경상도 출신 대통령들이 그들의 태생적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전라도 위주의 발전 정책을 펴는 바람에 대구는 닭 쫓던 개 모양이 되었다. 이처럼 대구는 고향 사람이 고관대작이 돼도 역차별받느라 오그랑망태가 됐다. 그런 가운데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일이 발생했다. 어떤 정치인이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은 서로 미워한다”는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남북이 갈라져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동서분열을 만든 정치인들이 있었으니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대구의 서문시장은 큰 장으로도 불리던 그 시절이 무색할 정도로 지방의 일개 시장으로 전락했다. 대구 또한 같은 이유로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필자가 1960년대에 서울로 유학 갔을 때 ‘경상도 학생’들은 인기가 있었다. 서울 마나님들이 일류대학 입학시험장에 나타나 ‘합격하면 자기 집의 가정교사’로 오라며 ‘입도선매’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제 서울 사람 가운데 대구 사람들을 미워하는 부류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대구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을 잘 모른다. 주위 환경의 변화 탓이라며 변명을 하고 있다. 경제적 환경은 그렇다 치더라도 예전의 그 향기 나던 대구 사람들로 돌아가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될 때이다.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 |
기사 작성일 : 2015년 02월 05일 |
서문시장 포목점.(1954년)
반월당백화점.
북성로 미나까이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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