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8> 북문시장 | |
대구 토박이라도 ‘북문시장’하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이 많다. 그런 시장이 있었느냐는 제스처이다. ‘칠성시장’이라고 하면 아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칠성시장을 굳이 북문시장이라고 부른 이유는 이 시장의 옛 이름을 말함으로써 대구의 옛 범위를 상상하게 하려는 의도에서다. 칠성시장은 처음 ‘동천시장’이란 이름으로 신천 북쪽에 자리 잡았다. 그러다가 1946년에 ‘북문시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필자가 어릴 때는 북문시장이라 불리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칠성시장으로 이름이 바뀌어 불리기 시작했다. 현재의 칠성시장은 단일 시장이 아닌 여러 시장이 모여 있는 복합시장이다. ‘대구청과시장’, ‘능금시장’, ‘삼성시장’, ‘가구시장’, ‘경명시장’, ‘대성시장’, ‘북문시장’, 그리고 ‘꽃시장’ 등 작은 위성 시장이 모여 큰 칠성시장처럼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북문시장은 없어진 것이 아니고 새로 생성된 여러 기능을 가진 시장들에게 포위되어 마치 없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어묵’을 필자가 어릴 때는 ‘덴뿌라’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오뎅’이라고 부르다가 현재는 어묵으로 불린다. 필자 친척 가운데 칠성시장에서 어묵공장을 하는 분이 있었다. 필자의 집은 칠성시장에서 주로 장을 봤기 때문에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자주 그 시장에 갔다. 간 김에 어묵공장에서 놀다 오곤 했는데 숙수(음식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능숙한 솜씨로 반죽 덩어리에서 칼로 한 줌 뚝 떼어내 동그랗고 길거나 납작하고 편평한 어묵들을 도마 위에서 쓱쓱 형태를 만든 뒤 포를 떠서 휙 하고 지글지글 끓는 기름솥에 던지는 모습은 어린 필자의 눈엔 신기했다. 예술이었다. 그 빠른 솜씨에다 항상 일정한 크기와 부피를 지닌 어묵들이 만들어지는 걸 보노라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하고 신기하게 바라봤다. 요즘은 어묵을 튀기는 기름이 달라졌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고래 기름에 어묵을 튀겼다. 그 기름은 울산 장생포에서 사온다고 했다. 방금 튀겨낸 어묵은 식었을 때보다 세 배쯤 컸다. 채 식기 전에 설탕가루에 한 바퀴 굴렸다가 한 입 베어 물면 치아 사이로 '찍'하면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기름과 설탕이 뒤섞여 맛이 환상적이었다. 요즘도 다시 한 번 먹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칠성시장은 위성 시장이 없었고 그저 단일 시장이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이미 작은 시장 역할을 하는 구역들이 정해지고 있었다. 단 것이 드문 시절인 탓에 과자집 골목에 있던 ‘노새집’ 사탕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리어카에서 파는 꽈배기 또한 필자 또래 애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입맛을 다시는 주전부리였다. 1970`80년대부터 푸성귀, 과일, 잡화, 생선 등의 전문시장으로 분화가 이루어져 갔다. 어른들은 나들이 갈 때 돼지고기나 개고기를 사러 칠성시장 고기골목으로 갔고, 아이들은 과자와 ‘애플 사이다’를 사러 잡화골목으로 갔다. 이처럼 칠성시장은 여느 대구의 옛 전통시장들이 쪼그라드는 것과 달리 점점 커지고 물품도 다양해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빠지지 않는 전통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칠성시장의 품목은 풍성해지고 덩치도 커졌지만 옛 모습이 사라져 아쉽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약장수가 없어진 것이다. 약장수들은 특성상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존재감이 더 드러난다. 옛날 대구 약장수들은 ‘양키시장'(교동시장)과 시청 앞, 그리고 칠성시장에 자주 나타났다. 양키시장에서는 그때까지도 몇 군데 남아 있던 공터에 한두 명이 약을 팔았다. 그곳의 약장수는 아코디언이나 색소폰 등을 직접 연주하고 노래하는 여가수 한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게 특징이었다. 뱀을 갖고 나와 “애들은 가라”며 손님을 불러모았다. 주로 파는 약은 뱀으로 만든 정력제였다. 자주 부르는 노래는 ‘울고 넘는 박달재’, ‘향기품은 군사우편’, ‘비 내리는 고모령’, ‘전선야곡’ 등으로 지금 노래방에서 60, 70대가 많이 부르는 노래들이었다. 우리는 이들을 '뱀장수'라고 불렀다. 시청 앞에는 근육질 남자 두어 명이 철사로 몸을 묶어 근육을 부풀려 철사 끈 터뜨리기, 손으로 작은 바위 깨기, 이빨로 끈으로 묶은 무거운 물건 들어 올리기 등 차력과 모자에서 비둘기 만들기, 입에서 만국기가 줄줄 나오는 마술 등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칠성시장 약장수는 아마추어 약장수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약을 팔았다. 넓은 신천 둔치에 무대를 만들어 공연했다. 커다란 무대는 광목으로 뒤를 가리고 노래는 판소리를 했다. 창을 하는 사람들은 여자들이었다. 약은 병에 든 물약으로 주로 영양제나 강장제, 소화제였다. 약장수들은 자신을 약을 파는 사람이 아닌 무료 국악 공연만 하는 예술인처럼 행세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공연하는 중에 약을 팔았다. 이런 광경은 지금도 유명가수의 공연장에 가면 복도에서 음반을 파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사람들 역시 약을 파는 것이 주된 일이면서도 마치 국악 공연하는 것처럼 행세하며 점잖게 약을 팔았다. 1960년대 영국가수 ‘클리프 리처드’가 서울 이화여대 강당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시절 놀랍게도 열광 여성 팬이 자신의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어 무대로 던진 적이 있는데 이런 것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뼛속부터 음악을 사랑하는 DNA가 있는 것 같다. 이 소녀들이 ‘오빠부대’의 원조일 것이다. 당시 약장수 등이 공연을 하면 열성팬들이 칠성시장 아래 신천 둔치를 꽉 메웠다. 대구의 많은 옛 시장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가고 있는 지금, 칠성시장은 오히려 청춘처럼 피어나고 있어 그곳을 지날 때마다 기분이 좋다. 시장의 진정한 맛을 내기 위해 판소리 극단을 부활시켜 축제가 열리는 날을 기대해 보는 것은 필자의 지나친 욕심일까.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 |
기사 작성일 : 2015년 02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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