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0)중앙시장

思美 2015. 9. 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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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0)중앙시장

 

중앙시장은 망하고 없는 시장이다. 그러나 중앙시장은 그 흥망성쇠가 마치 대구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자 우리나라와 일본의 온갖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대구로 몰려들었다. 마치 미국 서부개척 시기인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와 흡사했다. 사람이 모여드니 자연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자야 할 곳이 필요했다. 당연히 유흥가가 번창했다. 1905년 1월 1일 대구역이 완성되자 향촌동(당시 무라카미 쵸)과 그 부근에 화려한 신도시가 형성됐다. 그곳에 ‘중앙시장’이 들어섰다.

1909년 경상감영이 없어지면서 관기제도가 없어지자 그 퇴기들로 구성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이 중앙시장 부근에 생겨났다. 그 기생들이 한국 역사의 여러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당시 고급 술집 ‘운정’에서 뛰어난 미모와 예기를 뽐내던 ‘앵무’라는 기생은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에서 최초로 대구에서 일어날 때 먼저 큰 집 한 채 값을 기부하는가 하면 다른 기생들을 지휘해 그 운동에 앞장섰다고 한다.

필자 친척 중에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집에는 ‘식모’가 둘 있었다. 나이 든 식모는 장을 봐 직원들 밥과 가족들 빨래를 했다. 어린 여자 아이 식모는 아이들을 돌보고 청소하며 잔심부름을 주로 하였다. 장작 군불 때는 일도 그녀가 했다. 그 아이는 목청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부엌에 앉아 군불을 땔 때는 항상 노래를 불렀는데, 때로는 청승맞고 때로는 신나게 불렀다. 까탈스러운 공장 사람들도 시끄럽다고 하지 않을 정도로 잘했다.

1980년대 어느 날, 필자가 동해바다 쪽으로 ‘춘월’이라는 횟집에 간 일이 있었다. 촌스럽다고 할까 하여간 어울리지 않는 그런 특이한 식당이름이었다. 상을 봐오는데 “고급 손님 같아 주인이 내가 직접 술상을 차려 왔소”하며 자신을 소개하는데 이름이 춘월이었다. “맙소사 이게 누군가 그 옛날 친척 집에 있던 그 작은 식모가 아닌가!’

뜬소문에 그 처녀가 대구권번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제 늙은 퇴기가 되어 비린내 나는 항구 주점의 주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춘월은 그녀의 기생 시절 예명이었다고 했다.

중앙시장은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태어났다. 주변 상권도 그렇게 발전했다. 유흥가가 불야성을 이루니 시장에서 파는 상품도 여느 시장과는 달랐다. 주로 요정과 일식집에서 안주나 반찬으로 쓰는 것들이 많았다. 바나나와 딸기, 수박, 마른 포도 등의 과일과 말린 대구포, 명태포, 명란젓, 문어, 광어, 새우, 조개 등 어패류 등을 주로 팔았다.

일제강점기 최고조에 달하던 중앙시장과 그 주변의 영광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1960년 말부터 중앙시장과 그 주변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미향’ ‘향미’,‘관광열차’ ‘주부센타’ 등의 일식집은 서양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술은 맥주가 주류를 이뤘으며 국산위스키가 처음으로 출시되었다. 가수‘최백호’가 불렀던 바로 그 ‘도라지 위스키’였다. 새로 생겨난 서양식 주점은 ‘흑장미’ ‘황금마차’ ‘인디언 클럽’ 등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궁전’이 한 수 높은 맥줏집이었다. 가계 구조가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2층이었고 중앙 홀에는 피아노가 있어 즉석 연주도 가능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서울을 제외하고 이 정도의 화려한 영업을 하는 곳은 대구밖에 없었다.

1969년부터 그곳에서 몇 년간 맥줏집 ‘인디언 클럽’을 경영했던 ‘오공’이란 별명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처음 술집을 시작했을 때는 서울 살다 온 내가 봐도 향촌동은 휘황찬란했어요. 물론 내 장사도 번창했죠. 그러나 건달들이 애를 먹일까 봐 그게 가장 걱정이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건 기우였어요. 대구 건달들은 명동보다 신사였어요. 그들이 자주 오긴 했어도 손 한 번 내민 적 없었어요”라고 회고했다. 향촌동의 건달 하면 단연 ‘향촌동파’였다. 한때 그 바닥에 있었던 ‘복대’라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의리로 뭉치고 약한 자를 지킨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약한 자를 지키기 위해 매일 운동을 해 체력을 길렀으며 작은 가계들을 딴 구역의 건달들로부터 보호했다.

향촌동의 성숙기는 한국전쟁 중이었다. 수많은 문인과 화가, 음악가 등이 대구로 피란 왔다. 그들은 ‘상록’, ‘향수’ ‘녹향’ ‘르네상스’ 등의 다방을 사랑방 삼아 모여들었다. 백조 다방에 앉아 담뱃갑 속의 은박지에 꼬챙이로 눌러 그림을 그리던 이중섭도 있었다. 주점 가에서는 ‘야수’ ‘오복이’ ‘깜돌이’ ‘복대’등의 건달이 멋을 냈고, 다방에선 음악가 김동진`나운영, 영화인 신상옥`최은희, 화가 권옥연`김환기 등이 모여들었다. 이렇게 전쟁 통에 굶주리며 죽어가면서도 향촌동의 영혼은 밝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시장 부근이 이렇게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하게 된 것은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큰 것이겠지만 대구의 지형지물도 한몫했다. 예부터 문필봉 아래에는 천하 영재가 태어난다고 했다. 멀리 팔공산과 낙동강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고 있고 가까이로는 경상감영이 도시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어 향촌동은 그 정기로 경제와 더불어 문화의 향기를 날렸던 것 같다.

감영에 있던 도청이 침산동으로 이사를 한 뒤로부터 중앙시장 부근도 쇠락의 길을 걸었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던 인걸도 사라지고 요정과 맥줏집도 없어졌다. 한동안 ‘학사주점’, ‘고구마 식당’, ‘대안식당’, ‘묵돌이식당’등 막걸리 집들이 겨우 주점가의 명맥을 잇다 이제는 모두 문을 닫거나 바뀌었다. 향촌동의 영광은 언제 다시 또 올까?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기사 작성일 : 2015년 03월 05일  

 향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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