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1) 팔공산 | |
산봉우리 가운데 유난히 그 끝이 뾰족해 붓처럼 생긴 봉우리를 ‘문필봉’이라고 하는데, 문필봉 아래에는 공부 잘하는 사람이 많이 태어난다고 전해오고 있다. 문필봉 중에 가장 유명한 곳은 경남 산청군 생초면 ‘필봉산’이다. 지리산 첩첩 산골짜기 마을에서 고시 합격자 30여 명, 교수`박사 30여 명이 배출되었으니 가히 그 봉우리의 영험함을 알 수 있다. 대구에도 팔공산에 문필봉이 있다. 팔공산의 문필봉은 여느 시골의 그것과는 스케일이 다르다. 크기도 크고 봉우리도 세 개나 된다. 팔공산 정상 ‘비로봉’을 비롯해 좌우의 ‘동봉’ ‘서봉’이 바로 그 봉우리이다. 신라는 일찍이 대륙 진출을 위한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대구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경주 토박이 수구세력들이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천도를 극구 반대해 이루지 못했다. 신라 왕들은 비록 수도 이전은 실패했지만 팔공산을 ‘중악’으로 삼고 동악은 ‘토함산’, 서악은 ‘계룡산’, 남악은 ‘지리산’, 그리고 북악은 ‘태백산’으로 정하였다. 즉 대구를 신라의 정신적 중심지로 삼은 것이다. 이처럼 팔공산은 ‘천년 신라 정신의 성지’에다 세 개의 문필봉까지 간직해 천하의 인재들은 대구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장차 국가의 커다란 과업을 이룩한다. 동해서 팔공산을 멀리서 보고도 대통령이 된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 구미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공부해 대통령이 된 박정희 문경초등학교 선생, 애기 때 대구로 이사 온 전두환 장군은 물론이고 팔공산 신용동에서 태어난 노태우 장군, 삼덕동에서 태어난 박근혜, 이들 모두를 대통령이 되게 한 상서로운 산이 바로 ‘팔공산’이다. 1970년대만 해도 팔공산에 오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근처로 놀러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공산댐’ 물속에 잠겨 있는 ‘동화천변’과 동화사와 파계사로 가는 게 팔공산 나들이의 전부였다. 일반인들은 산에 오르지 않았지만 많은 젊은 산악인들은 부지런히 팔공산에 올랐다. 한국의 수많은 유명 산악인이 대구 출신이 많은 것도 팔공산 덕이다. 그들은 이 ‘어머니 산’의 품속에서 히말라야를 꿈꾸고 기술을 연마하였다. 팔공산처럼 물 좋고 산까지 좋은 곳은 드물다. 게다가 불교 유적까지 두루 갖췄다. 정조의 묵객 ‘윤행임’이 영남인을 “태산교악(太山嶠岳-태산처럼 늠름한 기백)”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 산을 두고 한 말일 게다. 동화사 입구에서부터 팔공의 문화를 느낄 수 있다. 옛 주차장 옆 큰 바위에 마애불좌상(보물 제243호)이 ‘돋을새김’으로 조각돼 있다. 대구 사람들은 여기에서 부처님이 천년 동안이나 ‘장좌불와’(長座不臥-한순간도 잠을 자지 않은 채 꼿꼿이 참선의 자세로 앉아서 정진하는 수행법)를 하고 있어도 이를 아는 이가 별로 없다. 대구 사람들은 스케일이 너무 커 아주 유명한 것이 아니면 눈에 차는 것이 없나보다. 그 무관심은 염불암의 관세음보살과 문수보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화사에 못 미쳐 ‘무당골’이 있는데 한때는 그곳도 등산길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골짜기에 골프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그곳을 경유하는 산행은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더 가슴 아픈 일은 무당들이 자기네 골짜기에서 이제는 미국의 인디언 꼴이 되어 남의 눈치봐가며 굿을 하는 것이다. 팔공산의 수태골 바위 절벽에는 일 년 내내 대구 산악인들이 줄타기를 한다. 대구 산악인들은 팔공산 품에서 꾸준히 연마한 실력과 진취적인 정신으로 히말라야 여러 봉우리를 정복했다. 동봉 바로 아래 헬리콥터장에는 커다란 약사여래 불상이 서 있는데 왼쪽 앞머리가 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 누군가가 시멘트로 쳐 발라 두었다. 정말 보기 흉한 모습이다. 같은 부처님상이지만 관봉(갓바위) 부처님은 전 국민의 인기 속에 앉아 웃고 있는데 동봉 약사 부처님은 서서 우는 모양을 하고 있다. 수많은 불자와 스님들은 왜 동봉의 부처님은 외면하는 걸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부처님도 잘 생겨야 영험이 있다는 걸까? 팔공산 동쪽 ‘갓바위 부처님’도 지금에야 전국적인 부처님이 되었지 1960, 70년대에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선본사’ 스님들이 한 번 와달라고 전단지를 뿌리고 다녔다. 부처님 팔자도 알 수 없다. 파계사 뒷산에는 성철 스님의 7년 ‘장좌불와’, ‘동구불출(洞口不出-절 안에서만 지냄)’로 유명한 성전암이 있다. 성철 스님도 그 암자에 있을 때는 무명이었다. 하지만 종정이 되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는 법어로 스타가 되었다. 그 말은 기왕에 있던 선문답을 인용한 것이다. 이는 마치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그리스의 ‘델피’의 ‘아폴로 신전’ 기둥의 말을 인용해 유행시킨 것과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따름이다’라는 미국 육군사관학교 군가를 읊조려 자신의 말처럼 사람들을 감동시킨 맥아더 장군의 경우와 흡사하다. 산의 정상에는 ‘東峰’(동봉)이라고 새겨진 비석에 있다. 그런데 이 비석의 왼편 아래는 누군가가 작정을 하고 끌로 작은 글씨를 파낸 자국이 있다. 그 글 원문을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한솔 이효상’. 한솔 선생은 한국산악연맹회장도 하고 국회의장까지 했던 분이다. 그분의 언동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 한 행동이 분명하다. 차라리 비석을 뽑아내든지 그런 흉한 자국을 남긴다는 것은 유치한 범법 행위이다. 대구의 ‘어머니 산’ 비석이 훼손돼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보고만 있는 대구 사람들. 명산의 정기를 가지고 태어나고도 이렇게 산을 망치고 남의 가슴에 비수를 꼽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정말 남우세스럽다. 그래도 팔공산은 팔공산이요 금호강은 금호강이다.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 |
기사 작성일 : 2015년 03월 12일 |
팔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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