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3) 팔조령

思美 2015. 9. 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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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3) 팔조령

 

팔조령 초입은 가창에서 시작한다. 이곳에는 가창댐이 있는데, 지금에야 별 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한때 대구 수돗물은 전부 여기서 공급했을 만큼 중요한 곳이었다. 시민들에게는 생명수를 공급하는 고마운 곳이지만 누군가에겐 잊을 수 없는 비극의 공간이다.

댐쪽으로 들어서서 조금 가다 왼편 산기슭에 그 유명한 ‘골로 간다’는 말의 유래가 된 곳이 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우리 정부는 대구형무소에 10월 항쟁 관련자와 보도연맹 사람들을 잡아 가두었다. 그러다 전선이 인민군에 밀리자 수형자들을 이 골짜기에 데리고 와서 전부 총살했다. 이후 가창골은 1959년 가창댐이 생기며 수몰되면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지금은 간첩도 사형시키지 않는 세월이지만 당시는 용공혐의만 있어도 이리도 쉽게 사람을 죽였으니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 같은 비극적인 시대였다.

댐을 나오면 바로 앞에 ‘대한중석’이 있었다. 지금은 대구텍이라고 간판을 달고 있으니 누가 일부러 눈을 닦고 봐야 ‘그 옛날 대한중석이 여기 있었구나’ 하고 겨우 알아볼 수가 있다. 지금은 온갖 물건을 수출해 먹고살지만, 자유당 시절에는 ‘달성광산’에서 나오는 텅스텐(중석)이 우리나라 수출액의 60%를 차지했다. 이 광산은 주로 군 출신이 사장을 도맡았는데 포항제철을 만든 고 박태준  전 회장도 여기서 사장 경험을 쌓아 나중에 그런 큰 과업을 이뤘다. 현재 이 광산은 세계적 갑부 워런 버핏이 대주주로 있다. 대한민국 역사에 대구가 이렇게 시달리기도 하고 또 나름대로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냉천(찬샘)을 지나면 넓은 골짜기가 점점 좁아진다. 팔조령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재를 넘기 전 오른쪽에 유명한 녹동서원이 나온다. 서원은 김충선 장군을 모셨기에 유명한 것일 게다. 장군(22세 때)은 본디 사야가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의 장수로,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우 선봉장으로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내리게 된다. 그러나 영남의 선비골을 거치면서 이런 나라를 적국으로 삼기보다 조국으로 삼자는 생각에 같은 해 4월 20일 조선에 항복한다. 그 후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참전해 많은 공을 세웠고, 화약과 조총 기술을 조선에 전하여 새 조국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임금은 장군의 충정을 높이 사 성씨와 살 곳을 하사하였으니 성은 김씨요, 삶터는 우록이었다. 지금도 대구에 수학여행 오는 일본 학생들이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 수성못을 만든 미즈사키 린타로의 산소와 우록의 녹동서원이다.

그런데 대구사람들은 우록을 ‘우륵’이라고 잘못 발음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은 언론까지도 남의 조상 이름을 아이 이름 부르듯 하고, 남의 동네 이름도 아무 생각 없이 엉터리로 부른다. 이런 실례가 어디 있겠는가. 매우 조심해야 할 일이다.

동네 부근에는 남지장사라는 자그마한 절이 있는데 팔공산에 있는 북지장사와 한 세트를 이루는 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장보살은 지옥문 앞에 서서 중생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막아준다. 이렇게 남북에서 지장보살님들이 지켜 서 있으니 대구 사람 중 지옥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드디어 팔조령에 오른다. 대학 시절 청도 이서에 사는 친구 집에 갈 때 이 고개를 처음 넘어보았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대부분 비포장 길이라 좁은 고갯길을 넘던 버스가 추락해 사람이 많이 죽었다. 그중 악명 높은 고개는 청송 노구재(노귀재), 고령 금산재 등이었는데 당시 팔조령이 순위에도 없었다지만 그렇다고 만만히 볼 길은 아니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고개를 오르던 중 정상에서 내려오는 차를 만났는데 내가 탄 버스가 뒤로 후진해 주었다. 가만 보니 차 꽁무니가 허공에 걸려 있었다. 많은 사람이 아우성을 쳐서 차를 세우고 간이 큰 사람들은 그대로 차를 타고 앉아 있고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내려서 길을 걸어 올라갔다. 지금도 팔조령만 오면 그 시절 기억이 떠오른다.

이 고개는 398m밖에 되지 않는 낮은 산인데도 길이 험해서 사고가 잦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는 옛말이 되었고, 최근에는 산을 관통하는 굴이 뚫려 한적한 드라이브 길이 되었다. 옛길을 더듬어 가다 보면 휴게소가 있는데 그곳 큰 바위에 ‘팔조령’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이호우 시인이 쓴 글이다. 이호우 시인은 경북 청도 출신이지만 경기고를 나오고 대구서 언론인으로 유명했던 시조시인이다. 우리는 그의 여동생 이영도 시인을 더 기억하고 싶다.

이영도 시인은 경북여고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살았다. 21세에 딸 하나를 둔 과부가 되었는데 28세 때 통영여중서 가사 교사로 근무하면서 자신보다 열 살 많은 시인 유치환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청마가 죽을 때까지 21년간 애틋한 사랑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중에 일부를 출판한 것이 그 유명한 ‘사랑하였길래 행복하였네라’라는 편지집이다. 어떤 이들은 유부남이 과부를 사랑했다니 불륜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음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이야기가 쉽게 나오지 않을 듯도 하다.

이영도 시인은 부산에 근무하고 유치환 시인은 경남 안의에서 근무할 때 이들의 데이트는 주로 부산서 이루어졌다. 교통이 나빴던 시절이라 안의에서 부산까지는 12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먼거리를 애써 달려와 만나서는 몇 마디 쑥스러운 말만 하고 헤어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편지가 그들의 애정 교류의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나는 어리석어 사랑과 불륜은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팔조령 고개에서 청도를 내려다보며 이 고개가 대구와 청도의 분계선이라고 하는데 어디까지가 청도이며 어디까지가 대구인지를 모른다. 하긴 그 고개의 허름한 찻집에서 달디단 커피를 마시면 되지 굳이 어디가 대구인지 청도인지 알 필요가 있을까? 팔조령 하늘 위를 무심히 지나가는 구름에 그 질문을 해본다.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기사 작성일 : 2015년 03월 26일

녹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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