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4)담티고개 | |
범어네거리 건너 왼쪽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있는데 무심코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푸른 망으로 둘러싸인 골프 연습장만 보고 그 야산에 백로가 서식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 설사 아는 사람이 있더라도 만촌동 백로는 희귀하게 시내 한가운데 서식하는 길조이건만 그 귀함을 모르고 새는 새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서로 ‘닭이 소 보듯’ 모른 체하고 지낸다. 이런 경우는 대범하다고 해야 하나 무식하다고 해야 하나 그 표현이 참 난감하다. 다른 도시 같으면 자랑하느라 난리를 피울 텐데 말이다.
이곳을 지나 만촌네거리에 가면 육군 제2작전사령부(옛 2군사령부)가 있다. 한강 이남의 모든 육군은 이 부대에서 지휘한다. 대도시 한가운데 이런 큰 부대가 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게다가 동촌 비행장도 시내 한복판에 있으니 정말 대구는 군사도시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국방부와 대구시청 공무원들은 이런 부대의 많은 군인과 그 가족들을 위한 복지시설이나 휴식공간을 따로 마련해주지 않는다. 이곳을 거쳐 가는 군인과 그 가족을 즐겁게 해주는 시설이나 모임이 있으면 대구의 경제적인 발전에 도움도 되고 이미지 향상에도 보탬이 될 텐데 ‘대구 사람 백로 보듯’ 오불관언이다. 군인들이 이렇게 푸대접받는 곳이 우리나라 말고 또 있을까?
1961년 5월 16일 당시 2군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소장은 서울로 가서 쿠데타를 일으킨다. 박 소장이 임지를 떠나 수없이 서울을 다니면서 거사를 계획했으니 이런 조짐은 사령부 정문 초병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이철희 육군 방첩대장은 벌써 이런 유의 계파들을 다 파악해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도표까지 그려 보고하였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그런 중요 사항을 육참총장만 알고 끝났을까? 현석호 국방부 장관, 윤보선 대통령도 알고 당시 국정 최고 책임자였던 장면 총리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가 권력 쟁취를 위한 진흙탕 싸움에만 여념이 없어 딴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설사 군인들이 난리를 일으킨다 해도 자파를 옹립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속셈을 하고 있었다.
막상 일이 터지자 결과는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두 쪽 다 함께 파멸하고 만다. 젊은 군인들이 기성 정치인들을 배제하고 박 소장을 옹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면 정권 중에 이런 군인들의 난동을 막지 못한 죄를 뉘우친 이는 딱 한 사람밖에 없다. 현석호, 이 양반은 당시 국방장관으로서 군인들의 일탈을 막지 못한 점에 대해 속죄하고자 천주교에 귀의했다. 그리고 한 맺힌 여생을 전도와 묵상으로 마감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구 동부는 군인의 기가 센 곳이다. 명나라 장군 두사충도 만촌동에 이야깃거리를 만든다. 임진년 왜병이 쳐들어오자 조선의 우방이었던 명나라군이 출전했다. 총사령관 이여송 그리고 그의 작전참모인 두사충도 함께 조선에 온다. 두사충은 시인 두보의 21세손이라고 하는데 아들 둘과 사위까지 참전한다. 1차전인 임진왜란에 참전 후 귀국했다가 정유재란 때 또다시 참전한다. 전쟁 후 두 장군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의 시대가 오는 꼴이 보기 싫어 조선으로 귀화한다. 두 장군의 산소는 형제봉에 있고 만촌동에는 그의 공을 기리는 모명재가 있다.
‘비 내리는 고모령’이라는 노래가 유명해지자 서로 우리 동네 뒷산에 고모령이 있다고 입에 거품을 물기도 했다. ‘인터불고 호텔’ 측에서는 자신들의 호텔 옆에서 고모 가는 작은 언덕이 그 고개라며 아예 노래비까지 만들어 두었다. 그러나 2군사령부에서는 그들의 영내에 있는 형제봉의 형봉과 제봉의 사이로 난 고갯길이 바로 고모령이라고 우긴다. 그러나 다 근거 없는 소리다. 그 노랫말을 작사한 유호 선생이 생전에 말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국방부 정훈국에서 연락이 왔는데 전장으로 출전하는 아들과 어머니의 애타는 이별 장면을 그려달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선생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대구와 경산 쪽의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다 무릎을 쳤다고 한다. 고모(顧母)라는 지명이 그의 눈에 띄인 때문이다. 고모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어머니를 돌아본다는 뜻이다. 입대를 명령받아 대구 훈련소로 향하는 아들이 고향 뒤 고개에서 어머니와 마지막 작별을 나누는 장소. 차마 그냥 가지 못하고 어머니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고모라는 지명에서 따온 유호가 창작한 고개 이름이 고모령인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산을 밀어 ‘담티’라고 부르는 고개가 생겼지만, 그전까지는 부산, 청도에서 오는 과객들은 ‘솔정고개’로 넘어다녔다. 고모에서 솔정고개를 오는 산골짜기 어디에 고모령이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부엉새 울던 밤. 비 오고 가랑잎 휘날리던 그 산마루턱을 떠난 용사는 무사히 귀향하였을까? 아니면 초연이 사라진 깊은 산 계곡 녹슨 철모 앞 비목 아래 누워 있을까? 가수 현인은 알 것이다. 병사나 어머니나 가수 모두 하늘나라에 함께 있을 테니 말이다. 담티고개는 예나 지금이나 대구의 흥망성쇠와 더불어 웃고 울면서 그 자리에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 |
기사 작성일 : 2015년 04월 02일 |
모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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