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5)신천

思美 2015. 9. 8.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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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5)신천

 

신천(新川)은 최정산에서 발원한다. 이 골짜기 물이 가창골을 지나서 용계동으로 나오며 팔조령서 내려온 물과 합쳐 신천이 된다. 어떤 이는 신천의 발원지를 앞산의 강당골이나 삼정골로 잡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긴 쪽을 근원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하고 또 그런 어려운 문제는 지리학자들에게나 맡길 일이고 일반 시민들은 쉽게 생각하고 살자.

신천이 한때 대구 시내로 흘러갔다는 말이 있다. 즉 용두산에서 남구 봉덕동 효성타운, 수도산, 건들바위, 동산동, 서문 치안센터 순으로 흐른 다음 달성공원으로 가서 나중에는 달서천으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그래서 큰물만 나면 대구읍성이 물에 잠겨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자주 생기자 정조 2년(1778년) 대구 판관 이서(1732∼1794)가 개인재산을 털어 용두산 물을 막아 물길을 오늘날 신천 쪽으로 흐르게 했고, 신천이 생긴 후로는 물이 시내로 범람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담이지만 사실과 거리가 먼 것 같다. 판관이 무슨 돈이 있어 그런 큰 공사를 하였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의 신천도 본래 흐르고 있었는데 마치 새로 물길을 내어 새로운 개천이 된 것처럼 말하는 것도 논리에 맞지 않다. 정조 전의 기록에도 신천이란 말이 나온다. 아마도 대구 판관 이서는 신천의 한 지류를 막아 본류인 신천으로 흐르게 하였을 것이다.

서거정 선생의 ‘대구팔경노래’에 건들바위 아래 흐르는 물을 찬양하는 글귀가 나오고 오늘날 관덕정 앞 개울에서 천주교인들의 목을 잘라 개천에 버렸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쪽에도 분명히 물이 흐르긴 흘렀나 보다. 하지만 그 물줄기가 신천의 본류가 아닌 샛강이었을 것이다. 즉 신천이란 말은 새로 만든 개울이 아니라 사이천, 새천 등으로 몇 개의 강줄기 중 사이 강이라는 뜻이 맞을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서 판관의 업적을 기리고자 상동교 부근에 비를 세웠다. 그 몇 개의 비문을 보면 ‘李公堤’(이공제) 혹은 ‘李公逝 公德碑’(이공서 공덕비)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한문깨나 한다는 사람이 어느 날 나더러 “저것 봐! 당시 판관 이름은 이서가 아니라 이공서 잖아!”라고 핀잔을 주어 속으로 한참 웃은 적이 있다. 그는 조선 시대 비석에는 사람 이름 앞에 처사나 공이란 수식어가 들어가는 걸 몰랐던 모양이다.

상동교 부근에는 수성못이 있다. 이 못이 있기 전에는 수성 들판의 농부들은 비가 오면 웃고 가물면 울며 그렇게 살았다. 당시에도 정부에서 만든 못이 있었지만 크기가 작아 농사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14년 일본인 미즈사키 린타로(水崎林太朗)가 못을 새로 설계해 10년 공사 후 오늘날 수성못을 만들었다. 이 못이 생긴 후로는 수성 들판 농민들은 가뭄 걱정에서 해방되었다. 린타로의 가족은 고향인 기후(岐阜)로 돌아갔지만, 자신은 수성못을 바라보며 지금도 못 가에 누워 있다.

신천 상류에는 수달이 살고 있다. 1970년대 경남 산청에서 수달이 발견되었다고 신문에 대서특필했던 생각이 난다. 맑은 물에만 산다는 수달이 구정물인 신천에도 살고 있으니 대구 수달은 대구 사람을 닮아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의 짐승’이라는 친근감이 든다.

신천이 동신교쯤 오면 보(洑)가 나오는데 그 아래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다. 그 옛날 집채만 한 짐승이 신천을 헤집고 다녔다니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대구 사람들은 그런 발자국은 의성 금성이나 경남 고성에만 있는 줄 알고 남의 집에서 남의 발자국만 보러 다니고 있으니 정말 딱한 일이다. 시간이 날 때 전국 명산대처만 찾지 말고 내 집 앞을 답사해보는 것도 돈 들지 않는 힐링 방법일 것이다.

동신교에서 얼마 가지 않으면 ‘푸른 다리’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대구 사람인가를 알려면 푸른 다리를 아는가 물어보면 된다. 기차 다리 중에 흔치 않은 시멘트 다리로 그 당시에는 나름대로 멋을 부린다고 초록색 칠을 해놨으므로 다리의 별명이 푸른 다리이다. 작은 개울을 건너는 짧은 다리이므로 대구에 살아도 이쪽에 잘 가보지 않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러나 110년 전에 만든 다리가 조각 하나 떨어진 것 없이 건재한 걸 보면 일본이 엉터리 짓을 많이 하였어도 그들의 기술 하나는 혀를 내두르게 한다(최근에는 푸른 철교로 바뀌었음). 서울의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서울시의 해명이 다리 만든 지가 10년이 훌쩍 지났고, 교통량도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뻔뻔스럽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오늘날 KTX가 시속 130㎞로 씽씽 다녀도 멀쩡한 푸른 다리를 보면 착잡해진다. 이 다리는 그렇게 ‘반일’ 한다던 김영삼 대통령이 왜 뜯어내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아무리 미워도 상대가 잘하는 건 잘한다고 해줄 때 그를 이길 수 있다.

동신교에서 칠성교에 이르면 다리 건너에 가스 공장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공장으로 석탄으로 가스를 만들어 각 가정에 공급했다. 이 가스는 1960년대 말까지 대구 부잣집의 보조연료로 쓰였다. 가스관이 수도관처럼 땅속에 놓여 있어서 관을 끌어 오려면 땅을 파서 공사했다. 가스불이 약해 빨래를 삶거나 밥을 할 때는 쓸 수가 없었고 찌개를 끓이거나 국을 덥힐 때 쓰는 정도였다. 이 가스는 나중에 없어졌지만, 한동안 부잣집에서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제 신천은 침산(砧山)을 보며 금호강으로 치닫는다. 침산은 다듬잇돌 닮았다고 침산이라고 했다는데 한문이 어려워 외지 사람들은 점산이라고도 한다. 침산은 아무래도 박작대기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대구 성터를 없애버린 친일파 경북감사, 한때 그의 무덤이 침산에 있었는데 묘를 쓸 때는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해방 뒤 한참 있다가 때늦게 죽일 놈이라며 산소를 옮기도록 했단다. 박작대기, 박정양 감사가 대구성을 다 뜯어도 당시에 아무도 데모를 하거나 난리를 피웠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작은 개울 신천은 이제 형님인 금호강의 품에 안긴다. 작은 것은 큰 것의 품에 안길 때 안정이 되는 것이다. 그 금호강은 더 큰 강으로 흘러들어 갈 것이다.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기사 작성일 : 2015년 04월 16일

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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