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6) 금호강

思美 2015. 9. 8.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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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6) 금호강

 

대구 사과는 1899년 동산병원에 의사로 온 미국인이 처음으로 대구에 갖고 왔다고 한다. 혹자는 이를 대구 사과의 효시(嚆矢)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원래 사과가 있었다. 옛날에는 사과를 능금이라고 불렀는데, 고려 시대(1083년쯤)에 출간된 계림유사에 ‘임금’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됐다. 우리 어릴 때는 재래종 사과를 ‘산능금’이라 불렀다. 이 능금은 크기가 불과 어른 엄지손가락 첫째마디 만하여 작고, 떫고, 시어 아무도 먹지 않았다. 지금 동산병원 뜰에 있는 서양 사과나무는 우리나라 토종 능금과 별로 다르지 않은 ‘꽃사과’이다. 대구 사과는 서양 선교사보다 조금 늦게 일본 사람들이 금호강변에 심은 바로 그 ‘과실 능금’이 대구 사과의 조상이라고 해야 말이 된다.

대구서는 아직도 나이 든 축은 사과를 능금이라 부르고 공식적인 조합 이름도 ‘경북대구 능금협동조합’이라 되어 있다. 이제 그 대구 사과의 명성은 도시화와 기후 온난화로 대구의 영광과 함께 금호강에 흘러가 버렸다. 지금 대구 사과는 동구 평광동 골짜기에 아주 조금 남아 힘겨운 마지막 호흡을 하고 있다.

강물이 동촌으로 들어오면 그 유명한 ‘공군11전투비행단’ 비행장이 있다. 6`25전쟁 때 우리 공군의 발진기지 ‘대구공군비행장’,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비행장. 마릴린 먼로도 이곳에 와 UN군 위문공연을 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행장이다. 1969년 6월 29일 강신구(강신성일의 형님) 중령이 미국서 이끌고 온 최신예 전폭기인 팬텀 편대가 제주도 상공에 나타났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 편대가 날갯짓하며 이들을 에워싸고 동반 비행을 했다. 선후배 빨간 마후라들의 환영비행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 미그기의 기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우리 공군의 전력 강화를 위해 ‘미그 킬러 팬텀’(미그기 잡는 도깨비)이라는 별명을 가진 F4-D 전폭기를 미국에서 원조받았다. 보통 전투기를 인수해 올 때는 기체를 분리해서 배에 싣고 오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굳이 태평양 상공에서 공중 급유를 서너 차례나 하면서 팬텀기를 몰고 오라고 고집을 피웠다. 그 까닭은 바로 제주도 위에서 이 쇼를 하려는 것이었다. 세계 최신예 비행기를 공군 조종사들이 하늘에서 만났을 때 그들의 가슴에 뛰는 피를 계산했을 것이다. 제주도를 떠난 팬텀기는 편대장 강 중령의 고향인 대구의 동촌 비행장으로 오게 된다.

2010년 11월 23일 북한은 연평도를 포격했다.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은 무차별 공격이었다. 우리 해병대가 K-9 자주포로 이를 격퇴했지만, 이미 그 시각 연평도 하늘에는 우리 공군의 F-15K(슬램이글)가 떠 있었다. 만약 북한이 조금만 더 발악을 했으면 이 전투기의 미사일에 북한의 서쪽 해변은 불바다가 됐을 것이다. 슬램이글은 대부분 대구비행장에 있고, 일부 청주비행장에도 있다. 대구는 예나 지금이나 이렇듯 최신예 비행기의 모 비행장 노릇을 하는 곳이다.

슬램이글에 탑승해 본 적이 있다. 물론 하늘을 비행해 본 것은 아니고 지상에 있는 비행기에 들어가 앉아 보았다. 전투기는 처음 타본 것이라 과거 비행기와 비교할 수 없어도 동체에 다는 각종 미사일 숫자도 많거니와 그 가격도 모두 억대라고 해서 놀랐다. 저 무거운 무기를 달고 어떻게 조그마한 비행기가 날아다닐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조종사 헬멧도 써보았는데 헬멧 앞쪽 화면에는 온갖 표시가 나타났다. 적기를 보면 눈만 마주쳐도 미사일이 발사돼 상대를 격추할 수 있다고 한다. 무기는 항상 사나이 가슴을 뛰게 한다. 게다가 최신예 전투기라고 하니 더욱 감격스러웠다. 이런 고급무기를 갖고도 왜 북에 당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옛날 대구 젊은 남녀들의 데이트 장소는 수성못과 동촌 금호강이었다. 강변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요기도 하며 깔깔대며 만남을 즐겼다. 그리고 단둘이 보트를 타고 강심(江心)으로 간다. 아무도 보지 않는 보트 안에 앉아 서로 쳐다보며 차마 손도 잡지 못하고 가슴만 두근거렸다. 그때 만나 지금까지 죽이느니 살리느니 하며 사는 집이 많다. 서로 말한다. “참 신기하다. 저 인간이 그땐 왜 그렇게 좋았을까?”라고.

인터불고호텔 왼쪽 절벽에는 시멘트로 된 어떤 구조물의 희미한 흔적을 볼 수가 있다. 몇 년 전까지는 그 구조물에서 녹슨 긴 쇠 파이프가 나와 강물까지 연결된 것도 보였다. 그 건물이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얼음 창고다. 그때는 강물이 맑아 마실 수 있었기 때무에 강물로 얼음을 만들었다. 그 얼음 창고 아래가 대구서 가장 좋은 썰매 타기 장소였다. 물이 깊어 얼음이 두껍게 얼어 빙질이 좋고 또 얼음판의 넓이가 넓어서 시내서 썰매깨나 탄다는 애들은 거기로 몰려들었다. 많은어린 아이들이 이곳에 빠져 죽었다. 신천 푸른 다리 아래도 악명 높은 곳이었지만, 얼음 창고 아래가 가장 슬픈 이름의 강물이었다.

강은 검단동을 돌아 강창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지금은 완전히 변해버려 아는 사람도 잘 찾지 않는 곳. 강창 매운탕 동네이다. 지금의 강창교가 생기기 전에는 커다란 나룻배가 버스를 싣고 금호강을 건너 성주 쪽으로 갔다. 그 시절 강창 나루터에는 매운탕집이 유명했다. 5`16이 일어나고 당시 국가재건최고위원장이었던 박정희 대장은 서울 가서도 가끔 이곳에 와서 매운탕을 먹었다. 이제 박 대통령도 가고, 강신구 장군도 가고 없다. 얼음 창고, 능금밭, 강창 매운탕집도 없어졌다. 나룻배마저 사라진 금호강. 높은 산(峨), 큰물(洋)이란 뜻이 있는 아양교(峨洋橋)에서 어제 그 물이 아닌 오늘의 물을 하염없이 내려다본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

기사 작성일 : 2015년 04월 23일

 동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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