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8) 판잣집 | |
삽화=조성호
그 무렵까지도 현재 대구시청 자리에 ‘무덕관’(武德館)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건물이 남북으로 앉아 있다가 중앙로에서 동인파출소 쪽으로 길을 내면서 동서로 위치를 돌렸다고 한다. 내 어린 시절 그 이야기를 아버지께 들으면서 어떻게 저런 큰 집을 통째로 옮길 수 있었을까 하며 놀랐다. 그 건물은 크고 웅장해 지금 어디 내어 놓아도 꿀릴 것이 없는 규모와 건축미를 자랑했다. 더구나 무(武)와 덕(德)을 가르치는 곳이라 그런지 장엄하게 보여 그쪽으로 가면 저절로 마음이 엄숙해졌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저녁때 그곳에 가서 유도, 검도를 구경했다. 나도 거의 매일 구경을 가다가 나중에 그 체육관에 등록해 유도를 배웠다. 마루의 3분의 2쯤은 매트리스를 깔아 유도장으로 쓰고, 나머지는 맨 마룻바닥을 검도장으로 썼다. 일제강점기의 군국주의 풍습이 남아선지, 아니면 무술은 원래 그렇게 하는 건지는 몰라도 규정이 엄격했다.
체육관으로 들어갈 때는 중앙에 걸려 있는 태극기에 공손하게 경례를 한다. 그리고 흰 띠 하급자들은 남쪽 벽 쪽으로 앉는다. 검은 띠 상급자들은 북쪽 매트리스에 앉는다. 잠깐 정신을 가다듬는 ‘정신일도’(精神一到) 한 뒤, 그날의 사범이 연습을 명한다. 명령이 떨어지면 모두 줄을 서서 일단 낙법으로 몸을 푼다.
상급자들이 벽 쪽으로 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을 손짓해서 불러 세운다. 불려 나가면 나약한 정신상태에 대한 지적을 받으며, 혼쭐이 난다. 운동을 배우러 갔으니까 죽도록 열심히 해야겠지만 안 당해본 사람들은 모른다. 아직 낙법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초짜들인데도 선배들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사정없이 엎어치기, 허리치기, 다리걸기 등으로 바닥에 내리꽂고 던진다. 몇 번 이렇게 당하고 나면 그냥 도망가고 싶다. 한 번은 푸른 띠의 서양인이 나를 지목했다. ‘나를 만만하게 본 건가’라는 생각이 들어, 본때를 보여주려 나섰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 서양인은 나를 냅다 엎어치기로 땅바닥에 내던진 후, 가슴에 올라타고 목을 조른다. 죽을 것 같다는 공포심이 들었다. 하지만 항복은 못 한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신이 혼미해지고 온몸에 기운이 빠지니 항복의 신호로 손바닥으로 바닥을 친다.
이렇게 거대하고 엄숙한 건물이 대구에 있었는가 하면 형편없이 작고 초라한 판잣집도 있었다. ‘무덕관’ 뒤에 그런 집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피란민들의 집이다. 시청 부근에는 일제강점기에는 경마장이 있었다고 했다. 그 경마장이 도시화로 없어지고 무덕관 앞쪽에는 시청이 들어서고 동인파출소 쪽으로는 철도와 관련된 관사가 들어섰다. 옛 흔적 탓인지 6`25전쟁 이후에도 한동안 무덕관 뒤에는 말을 키우고 타보는 승마장이 있었다. 6`25전쟁 때까지도 시내 군데군데에 이런저런 이유로 빈 곳이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다. 시청 뒤 공터에도 피란민들이 몰려와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그리고 현재 서라벌여행사 뒤쪽에 있던 공터에도 판잣집이 있었다.
도심 속에 판잣집과 관사, 적산가옥이 공존하는 모습이 현재는 상상이 되지 않지만 그땐 그랬다. 집은 달라도 아이들을 스스럼없이 서로 동무가 되어 내왕했다. 우리 동네는 UN군의 외국말과 서울말, 이북말, 대구말이 뒤섞여 마치 외국의 여느 도시 같았다. 판잣집 애들은 신문팔이와 구두닦이 그리고 ‘아이스께끼’ 장사를 주로 했는데, 서울말로 상품을 외치며 팔러 다녔다. 대구 애들도 가난한 집 애들이나 혹은 재미로 이런 장사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장사를 할 때는 모두 서울말을 썼다.
피란민 신문팔이 중에 전설적 인물이 있다. 바로 대우그룹 창업자 김우중 전 회장. 김 전 회장은 6`25전쟁 때 경기도에서 대구로 피란을 와서 신문팔이를 했는데, 뛰어난 상술을 보여 아직도 신화처럼 전해진다. 딴 애들은 몇 시간이 지나도 다 팔지 못하는 신문을 어린 김 전 회장은 나가서 30분도 되지 않아 다 팔고 왔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이 신문을 팔러 가는 곳은 주로 방천시장이었는데 ‘신문’이라고 외치고 다닌 것이 아니라 아무 말도 없이 집집이 신문을 갖다준 뒤 나중에 돈을 받으러 갔다고 한다. 마치 ‘복조리 장수’처럼 말이다.
대구에서 대표적 판잣집 동네는 신천동 뚝방 동네였다. 그 외 큰고개 부근, 비산동 그리고 신암동의 감나무골 등이 있었다. 우리 동네 애들은 가끔 신천 판잣집 동네에 놀러 가기도 했다. 그곳은 우리 동네의 소규모 판잣집과 달리 큰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팔도 사람들이 모여 시골 5일장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철없는 피란민 애들은 그들의 비극적인 보금자리가 동화 속 동네처럼 느껴져 행복한 얼굴이었고, 게다가 둑 아래 신천은 그들의 신나는 수영장이었다. 어른들이야 비극의 마을이었겠지만, 최소한 우리 또래 애들은 꿈같이 행복한 동네였다. 판잣집에 들어가 천장을 쳐다보면 하늘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는 새지 않았다. 벽도 판자로 엉성하게 만들어져 바람이 술술 들어오는데 신문지로 용케 그 간격을 메워 냉기를 면하고 있었다. 북쪽에서 온 애들과 우리는 미군부대서 나온 미군 전투식량을 자주 나누어 먹었는데, 영어를 모르는 우리는 국방색 봉지를 뜯어서 커피면 버리고 프림은 나눠 먹었다.
판잣집 어른들이 삽이나 곡괭이를 빌리러 올 때가 있었다. 나중에 소문을 들으면 ‘누구는 학교서 예방주사 맞고 열이 나서 죽었단다’ ‘누구는 배가 아프다가 죽었단다’ 등 안타깝게 죽은 동네 꼬마들을 묻어주기 위해 삽이나 곡괭이를 빌렸다고 한다. 인간의 망각은 참 좋은 것이다. 그 지옥의 판잣집 시절을 이렇게 꽃동네처럼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권영재(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 |
기사 작성일 : 2015년 05월 07일 대구시청뒤 동인동에 남아있는 판잣집흔적.
금호강변 피난민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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