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20) 똥구두

思美 2015. 9. 8.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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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20) 똥구두

 

대구 북구 침산동 둑에 서서 금호강을 건너다보면 세 개의 마을이 보인다. 왼쪽부터 노곡동, 조야동, 무태다. 고 최무룡 씨가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고향 만나면 즐거웁던 외나무다리”라며 노래 부르던 시절, 이곳은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황혼이 하늘과 강물을 붉게 물들일 때 멀리서 강 위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행인들의 실루엣을 보면 가슴이 뛴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노라면 눈물도 난다.

멀리서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이 다리를 건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낭만적이고 아름다웠다. 정작 강을 건너는 주민들은 죽을 맛이었단다. 그들의 호구지책이 이 다리에 달렸으니 몸져눕기 전에는 밤낮없이 건너다녀야 했다. 사람이야 그렇게 외나무다리라도 건너 시내를 오갈 수 있지만, 이 동네에서 생산되는 능금, 상추, 파, 양파, 무, 시금치 등 푸성귀는 달구지에 싣고 강을 건너야 하는데 외나무다리로는 건널 수 없었다. 폭이 좁고 지지대도 약한 까닭이다. 노곡동 사람들이 사용한 달구지는 부엉덤이(부엉이 마을), 깐촌(까치 마을)을 지나 팔달교로 길을 돌아다녔지만, 조야나 무태의 짐차는 더욱 먼 길을 돌아야 했다. 연경동 군두리 마을을 지나 파군재 아래 거너실을 거쳐 불로동으로 해서 아양교를 건너야 겨우 시내로 갔다.

행인 전용도로인 외나무다리는 큰물만 지면 떠내려가기 일쑤였다. 홍수 때는 아예 다리가 떠내려 가버려 할 수 없이 사람들도 달구지가 다니는 먼 길을 돌아서 시내로 가야 했다. 다리가 걸려 있는 날이라도 밤이면 어린이와 여자들은 이 좁고 흔들거리는 소나무 다리를 혼자 건널 수 없었다. 시내에서 돌아오는 남정네들의 도움으로 다리를 건너거나 혹은 집에서 남자 어른들이 일부러 다리로 나와 함께 건너기도 했다. 당시에 나무가 귀한 탓에 소나무 다리는 자주 보수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군데군데 구멍이 나고 지주대가 꺾어져 많이 흔들거렸다. 이런 탓에 외나무다리가 생명선이지만 때로는 사선(死線)이 되어 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영영 집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전쟁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비극적 사건이다. 하지만 빛은 그림자와 함께하듯 전쟁 탓에 피해를 많이 입었지만, 외나무다리는 ‘업그레이드’ 됐다. 가냘프던 소나무 다리가 튼튼한 철판 다리로 바뀌었다. 이 다리도 휘청거리고 좁은 다리이긴 하지만 큰물에도 어느 정도 견뎌낼 수가 있었고 폭도 좀 더 넓어져 간단한 수레 정도는 다닐 수가 있었다. PSP(Pierced Steel Planking)가 바로 이 다리의 주재료이다. 미 공군에서 군용기 임시 활주로를 만들 때 쓰는 구멍 난 철판이다. 이 철판은 군부대 담으로도 쓰였고 민간인들의 담장, 닭장, 울타리에 사용됐다. 공사판에서는 건물을 지을 때 비계(飛階)로도 많이 쓰였다. 어른들은 일본말로 ‘아나방’(구멍 난 철판, 穴板)이라고 불렀다. 전쟁이 마치 이 철판을 만들려고 일어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온갖 곳에 쓰였다.

아나방다리가 깔릴 때까지 무태 사람들은 대구사람이면서도 궁벽한 농투성이가 대부분이어서 능금 과수원 주인이나 술도가 사장 말고는 애들을 중학교 보낼 형편도 되지 못했다. 아나방다리로는 학교 갔다 오는 학생보다 침산동 방직 공장에서 돌아오는 직공들과 시내서 돌아오는 품팔이, 칠성시장에서 장사하다 돌아오는 아녀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다리는 고달픈 귀갓길 변방인과 함께한 설움의 다리였다.

무태는 통상적인 동네 이름이고 행정상 이름은 서변동과 동변동으로 불린다. 서변동은 인천 이씨, 동변동은 능성 구씨 집성촌으로 이름난 곳이다. 한때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았던 이 동네도 상전벽해가 되었다. 엉성했던 아나방 다리는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거대한 다리가 세 개나 생겼다. 이제 말없이 흐르는 금호강만이 그때의 사연을 알고 있다.

대구의 한쪽 농촌에서 전쟁용품이 이렇게 쓰이고 있었을 때 도시의 한가운데서는 또 다른 전쟁용품이 쓰이고 있었다. 친구 중에 중학교, 고등학교 6년을 군화만 신고 학교에 다닌 이가 있다. 물론 집이 잘 살지 못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당시의 멋이 또 그런 것이었다. 돈이 있는 집은 흰 고무신을 신고 조금 가난하면 검은 고무신을 신었다. 나중에 중학교에 들어가면 돈이 있든 없든 운동화를 신는 것이 신발 신는 순서였다.

내 친구는 고무신에서 운동화로 진화하지 못하고 바로 군화를 신었다. 이 신발은 닦지 않고 몇 년씩 신는 바람에 전체가 칙칙한 회색을 띠었다. 모양도 일그러져 원래 상태를 알 수가 없다. 색깔, 모양이 다 이상해진 그런 군화를 우리는 ‘똥구두’라고 불렀다. 보통 똥구두는 고등학교에서 시작했는데 이 친구는 중학교에서부터 시작했다. 조그마한 애가 커다란 어른 구두를 털털거리며 신고 다니는 모습은 마치 ‘장화 신은 고양이’ 꼴이었다. 그 모습이 중학교 때는 동정심을 일으켰지만, 고등학교 때는 멋있게 느껴졌다. 이 친구는 대대장이라 아침 조회 때 높은 단위에 서서 행사를 진행했다. 우람한 체격에다 큰 목소리도 부러웠지만 이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바로 그의 발에 신겨 있는 색 바랜 군용 똥구두였다.

똥구두 신는 게 당시 고등학교 애들의 로망이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와 자신의 나약한 마음으로 차마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는 애들이 많았다. 우리 친구 중에는 ‘똥구두 신고 서울까지’라는 글을 쓴 이도 있었는데, 그는 방학 중에 낡은 군화를 신고 서울까지 무전여행을 해 진정한 ‘똥구두의 사나이’로 우리의 영웅이 되었다. 요즘 어느 시골집에 희게 변하고 밑창까지 없어진 구두를 신고 걸어서 서울 가는 고등학생이라며 밥 한 끼 요구하면 어떻게 될까?

공사장에는 아나방이 있고 학교에는 똥구두가 있었다. 전쟁은 파괴하는 놀음이다. 하지만 정(正)에는 반(反)이 따르듯 파괴의 파편 위에는 새로운 문화가 창조된다. 사람이 죽어야 사람이 태어날 수가 있다. 전쟁은 인간에게 혹독한 시련이다. 그러나 대구사람들은 그런 가혹한 환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폭넓은 호연지기를 갖고 있다.

권영재(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기사 작성일 : 2015년 05월 21일

 

용지봉계곡에 아직 사용중인 뿅뿅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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