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21) 장가고 | |
우리 집 주`부식은 주로 칠성시장에서 장을 봐 먹었으므로 나는 자주 어머니를 따라 장에 갔다.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나의 시장나들이는 주전부리와 풍물 구경에 목적이 있었다. 당시 아이들이 시장에서 즐겨 먹던 메뉴는 어묵, 꽈배기, 사탕, 부꾸미와 옥수수 빵이었고, 청과시장에 잔뜩 쌓여 있는 배추, 수박, 무가 큰 구경거리였다. 또 생선가게 널판에 갈치, 고등어, 꽁치, 빵게, 도미들이 널려 있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경부선 철로변에 있던 가축시장에는 눈을 끔뻑이던 닭을 주인이 눈 깜짝할 사이 칼로 목을 치고 잠깐 끓는 물에 닭을 담갔다 털을 뽑고서 손님에게 주었다. 이런 날렵한 모습을 보면 하도 일이 빨리 진행되어 ‘징그럽다’는 느낌이 들기보다 무술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경탄을 금치 못했다. 개는 가게 뒤편에서 작업(?)해 내어오므로 끔찍한 광경은 볼 수 없었지만, 붉은 피가 밴 개 다리가 가게 기둥에 걸려 있는 모습은 욕지기를 느끼게 했다. 신경통에 좋다고 가끔 사람들이 사러 오는 고양이의 말로(末路)는 정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뒷다리를 잡고 그냥 땅바닥에 내려치면 고양이는 입에 피를 주르르 흘리며 사지를 부르르 떨다 죽는다. 그래서 이 골목은 지옥 같은 느낌이 들어 어머니와 나는 이 길을 피해 굳이 먼 길을 돌아서 집에 왔다. 가끔 우리 어머니 ‘장가고’에 긴 파가 삐죽하게 고개를 내밀 때가 있다. 긴 파는 고깃국을 끓인다는 신호이므로 이런 장바구니를 보는 날은 천당 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는 온갖 전쟁용품이 일상에 유용하게 쓰였다. 그런 물건이 화약내 나는 전선의 것이 아니고 일상용품으로 쓰려고 만든 것처럼 시중에 나돌았다. 어머니의 장바구니도 전쟁용품으로 만들어졌다. 군용 전화선이 장바구니의 주 재료였다. 군용전화선, 속칭 ‘삐삐선’은 윤이 나는 검은 껍질이 싸여 있고 그 속에는 가는 철사묶음이 모여 있다. 이렇게 튼튼한 재료로 장바구니가 만들어졌으니 한 번 사면 오래 쓸 수 있었다. 어린 나는 전 세계 어머니는 모두 군용전선으로 만든 장바구니를 들고 장에 가고 그 명칭도 장가고라 부르는 줄 알았다.
내가 전방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삐삐선을 보고 혼자 임진강가에 앉아 웃은 적이 있다. 이 웃음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죽음의 놀이’에 쓰이던 군용전화선이 먹거리를 담는 장바구니가 되고 또 그것이 예쁘고 예술적으로만 보였던 철모르던 어린 시절이 우스웠고, 그다음에는 군대서 본 삐삐선의 기막힌 운명을 보고 또 한 번 웃었다.
보병의 야전훈련에 통신은 필수이다. 일부는 무선으로 통하지만 대개 유선으로 연락이 오간다. 이때 삐삐선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훈련 때만 되면 통신대장은 죽을 맛이었다. 이 골짝 저 능선을 뛰어다니며 훈련을 하다 보면 수 없이 전선을 끊었다, 이었다 해야 한다. 훈련이 끝나고 상급부대로 전선을 반납하려고 하면 중간에 잘라내 버린 삐삐선이 많아 처음 무게로 반납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물론 어느 정도 ‘손망실(損亡失)처리’ 규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새 발의 피다. 통신대장의 가슴은 새카맣게 멍이 든다. 순진한 통신대장은 청계천에 가서 제 돈 내고 삐삐선을 사오기도 했지만, 노련한 통신대장은 웃는다. 전선을 반납할 때 무게를 달아야 한다. 이때 전선 타래에 물을 붓고 모래를 끼얹어 무게를 달면 처음 지급받을 때보다 결코 줄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상급부대에서 온 보급관이 묵인해주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런 연유로 나는 혼자 웃었던 것이다. 시장에서 쓰이는 전쟁용품은 삐삐선 장바구니이고 남자 상인들의 필수품은 ‘돈 긴꼬(금고-金庫)’였다.
전쟁 필수품은 총알이다. 총알은 담배처럼 차곡차곡 탄환집에 들어가 있고 그 탄환집은 또 쇠로 만든 상자에 들어 있다. 이 탄환상자가 ‘장가고 시절’ 시장 상인들의 필수품이었다. 이 상자도 일본말로 불렸다. 지금은 통화 팽창도 없고, 돈도 단위가 높은 게 있어 물건 팔고 돈 넣는 통은 조그마해도 충분하다. 그러나 전쟁 후에는 통화가치가 떨어져 웬만큼 물건을 팔면 커다란 부대에 돈을 넣어야 했다. 시장의 작은 가게도 돈을 조금만 벌어도 지폐가 넘쳐나서 소총이나 기관총알을 넣던 상자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상인들은 쇠 탄환상자에 그들의 하루 수입을 눌러 담았던 것이다.
1차 대전 막바지, 독일의 어느 시골 학교에서는 그들의 선생에게 감명받은 폴 바우머와 그 친구 20명이 학도병으로 입대했다. 그러나 전쟁은 어린 학생들이 생각하듯이 낭만적이지도 않고 애국심 하나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방황하는 신병들에게 고참 케트는 그들에게 현실과 이상을 가르쳐주는 형이며 부모 같은 존재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학도병 대부분이 전사하고 케트도 적의 총알을 맞고 죽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폴 바우머도 적탄에 맞아 죽는다. 20명 모두가 몰사한다. 하지만 사령부 일지에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한 줄로 기록되었다. 죽음의 도구였던 군용전선과 쇠 탄환통이 마치 전쟁은 없었던 것처럼 삶의 도구로 환생해 내 어린 시절 칠성시장에서 활약했다.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 |
기사 작성일 : 2015년 05월 28일
장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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