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22)썰매 | |
썰매 타기는 먼 옛날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 중에도 있었고 전쟁 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는 논이나 못에서 썰매를 탔다. 시내에서도 좋은 얼음을 찾아 일부러 금호강이나 신천까지 원정 가는 극성스러운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하수구 얼음판에서 썰매를 탔다. 1960년대 중반까지도 대구의 동서를 통과하는 길은 좁았고, 그나마 수성교를 지나서 남산동 적십자병원 쪽으로 오면 길이 개울물로 막혀 끊어졌다. 개울에는 작은 다리가 많았고 동산호텔 쪽 산 아래는 초가집이 10여 채 모여 있었다. 한일로도 없었다. 만경관 앞은 비포장 흙길이어서 차가 잘 다니지도 않았다. 그 흙으로 된 광장에 국군의 날이면 전차나 대포, 전투기를 전시하기도 했다. 특별한 날은 야시장을 열기도 했다. 이 길은 중앙로에서 시작해 신천교로 이어졌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지금의 한일로에서 썰매를 탔다. 공평네거리에 있던 헌병대 담 아래를 흐르는 덮개 없는 수채가 썰매장이었다. 당시에는 썰매라고 부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대개 스케이트라고 했고 ‘스케-트’라고 일본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썰매는 피란민 아이들이나 교과서에서 쓰는 말이었다. 당시는 한국전쟁 중이라 도립병원(현 경북대학교병원), 중앙국민학교, 경북고등학교 등에 UN군이 주둔했다. 군인들은 이 길로 많이 다녔는데 수채에서 썰매 타는 헐벗고 야윈 우리를 보고 가끔 껌과 비스킷, 초콜릿을 던져 주었다. 그들은 무슨 마음으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하니 얼굴이 매우 화끈거린다.
우리가 타던 썰매는 따지고 보면 얼음이나 썰매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얼음장이란 것은 가정에서 나오는 시궁창 물이 얼어 있는 것이고 썰매도 조악했다. 당시에는 썰매 만들 재료 구하기가 어려웠다. 널빤지는 이곳저곳을 찾다 보면 썰매 만들 정도의 것은 어렵게나마 구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쇠꼬챙이는 정말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썰매를 만드는 애들은 무리를 지어 신천에 갔다. 당시 신천 둑은 유실을 막고자 바윗돌을 쌓아 굵은 철사로 동여매 놓았다. 특공대 아이들은 긴 시간 그 바위를 싼 철사를 돌로 찧고 또 찧었다. 그러다 보면 이윽고 철망이 끊어진다.
이렇게 잘라 낸 철사 여러 개를 동네에 갖고 와 친구들과 나누어 가졌다. 나눈 철사는 곧게 바로 편 다음 썰매의 바닥을 이루는 두 개의 긴 막대에 감고 끝은 구부려 못으로 고정한다. 일단 썰매의 본체를 만든 다음에는 철사를 불에 달구어 나무 막대기에 박아 넣는다. 이것이 썰매가 움직이도록 얼음을 찍는 막대기가 되는 것이다. 만약 불에 단 철사를 똑바로 꽂지 못하고 비스듬하게 꽂는 날에는 만사가 끝장이다. 그렇게 잘못 꽂힌 막대기는 곧장 헐거워져 몇 번 쓰지도 못하고 철사가 빠졌다. 요금 치과에서 임플란트할 때 치과 의사가 철심을 수직으로 박지 못하면 그 보철물은 말짱 헛것이 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어렵사리 만든 썰매의 발판은 두 발 넓이의 판자만 걸쳐 있고 쇠꼬챙이도 약하다. 이런 허술한 썰매는 우리 동네 아이들이 아니면 탈 수가 없다. 딴 동네 아이들이 우리 썰매를 타면 발판이 좁아서 쉽게 넘어지거나 쇠막대가 약해 얼음을 찍는 순간 철사가 휜다. 우리 동네 스케이트꾼들은 몽골 기병과 같았다. 작은 몽골 말로 커다란 말을 탄 유럽 기병을 물리치는 기술을 가진 몽골군처럼 우리 동네 아이들의 썰매 솜씨는 날렵했으며 균형도 잘 잡았다.
이런 와중에 소수 부잣집 아이들이나 삼촌이나 큰형이 있는 아이들은 사정이 달랐다. 썰매 발판도 아예 목재소에서 나무를 사서 만들어 균형이 잡혀 잘 넘어지지도 않고 썰매 칼날도 우리 같은 철삿줄이 아니고 식칼 같은 쇠 판을 나무에 박아서 썼다. 쇠막대도 철물점에서 아예 단단한 쇠 작대기를 사서 썼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급 썰매는 언뜻 보기에는 멋있었다. 하지만 막상 실전에서는 그 기능이 신통찮았다. 덩치가 커 수채 벽의 여기저기를 자주 부딪쳐 속도를 낼 수가 없었고 얼음 위에 조그마한 장애물만 있어도 타고 넘지 못했다. 이런 정통 썰매는 저수지에나 가야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옛날 로마가 그리스보다 국력이 약할 때 두 나라가 해전을 하면 번번이 로마가 졌다. 로마의 조선 기술이 모자란 것이 첫째였지만 배를 만드는 기자재도 부족하고 질도 부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해전만 하면 그리스가 이겼다. 자꾸 싸우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로마의 배는 부실한 대신에 가볍고 순발력이 뛰어나므로 느린 그리스 군함을 이리 치고 저리 빠지기가 좋았다. 허술함이 오히려 장점이 된 것이다. 우리 스케이트도 판자가 모자라 겨우 발 얹을 정도였지만 이 덕에 크기가 작아져 무게가 가볍고 날렵하게 운행할 수 있었다. 또 수채라는 좁은 공간에서 잘 부딪치지 않았다.
종일 좁을 수채를 왔다 갔다 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다고 나이 든 애들은 군데군데 얼음을 횡으로 파내 흙이 나오도록 했다. 이 흙길을 통과하려면 멀리서부터 썰매에 가속을 붙여 달려와야 이 맨땅을 뛰어넘을 수가 있었다. 영화 ‘벤허’에서 찰턴 헤스턴이 모는 전차가 스티븐 보이드의 완벽한 전차를 이길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다. 유대인이 만든 허술한 전차가 로마 것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지만 함께 달리는 말과의 교감, 그리고 찰턴 헤스턴의 전차 모는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수채 썰매도 타는 요령이 중요했다. 썰매 뒤쪽에 발을 모아 타면 그 땅을 통과할 수가 있었다. 이 방법은 잘못하면 썰매에서 추락할 위험은 있었지만, 장애물인 흙길을 쉽게 타고 넘을 수 있었다. 이것이 수채 썰매 레이스에서 쫓겨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그 수채 썰매꾼 중에서 유명한 기능공에서부터 과학자, 국회의원, 대법관이 나왔다. 예술인도 나오고 야구선수도 나왔다. 어떤 군 출신 대통령이 말했다. “대통령이 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 나야 한다”고. 우리 동네도 팔공산과 더불어 실개천 정기까지 받은 덕에 옳은 사람, 착한 사람이 많이 나왔나 보다. 이들의 출세에 산수의 정기 외에 수채 썰매에서 끝까지 살아남던 불굴의 투지 또한 그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권영재/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 |
기사 작성일 : 2015년 06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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