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23) 아재 | |
6`25전쟁 때 피란민 구두닦이들이 ‘구두 닦죠’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종로 피맛골 식당에서 식탁에 앉으면 종업원들이 “머디 깝쇼?”라고 묻는다. 대구서는 듣지도 못한 말이었다. 1960년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서울 사람 모두가 표준어를 쓰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가난한 서민이나 장사꾼들은 서울 사투리를 많이 쓰고 있었다.
대구 사람들이 순진하게도 교과서에 있는 말에 서울 억양을 적당히 섞으면 서울말이 되는 줄 알고 말하지만, 결과는 이도 저도 아닌 게 된다. 가령 서울역 앞에서 “염천교는 어디로 가나요?”라고 물으면 촌놈이다. “염춘교는 어디로 가나요?”해야 서울말이 된다. 참외는 ‘챔위’라고 불러야 서울 발음에 가까워진다. 누나의 남편은 자형이 아니라, 매형이라고 해야 서울말이 된다.
나는 서울에서 첫 한 달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서울 사람들이 나의 대구 말을 듣고 웃었기 때문에 무서워 말을 못했다. 그러나 배짱 좋은 한 친구는 담배 가게에 가서 “담배 주이소”라고 말했다가 주인이 ‘저 사람이 중국사람인가?’하고 담배는 주지 않고 쳐다보기만 해 민망하고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고 너스레 떨었다.
전공의 시절 교수 중 수양이 모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의 대구 말에 자주 시비를 걸었는데 그 사람의 지적은 같은 경상도 말이라도 부산 말은 음악적인데 대구 말은 시끄럽기만 하다고 이죽거렸다. 또 ‘경상도 사람들은 말할 때 처음에는 큰소리로 시작해도 끝말은 흐지부지하다’고 지적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화났을 때 당장은 무슨 일이라도 낼 듯 분기탱천해 씩씩대다가 나중에 흐지부지 끝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막상 남이 그렇게 비아냥거리니 짜증이 났다. 대구 살 때 같은 경상도라도 부산 사람을 ‘하도’(下道)라고 깔봤는데, 서울에서 일개 정신과 교수에게 내 고향 말을 깎아내리는 소리를 들으니 분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 사람은 나만 미워하면 됐지 왜 대구까지 싸잡아 욕하는지, ‘어떻게 저런 사람이 선생이 되었을까?’라고 자주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서울 사람들은 능금 껍질을 벗겨 먹는다고 한다. 능금 껍질은 칼로 깎아야 한다. 따뜻한 물을 더운물이라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며 찬물은 추운 물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말은 하지 않는다. “발 닦고 자”라는 말도 잘한다. 그러나 발을 물로 씻고 수건으로 닦고 자야지 어떻게 그냥 닦고 잔단 말인가? 심지어는 최불암이나 조영남 같은 유명한 방송인들조차도 ㅈ, ㅊ, ㅅ을 구별하지 않고 발음할 때가 잦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은 빗(빚)이 많아서 꼿(꽃)을 봐도 기쁘지 않나 봐요’라는 식으로 발음한다.
서울 사람들은 자신들도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면서 대구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엉터리 발음을 한다고 놀린다. ‘승리한다’를 ‘성리한다’로, ‘쌀밥이 맛있다’를 ‘살밥이 맛있다’로 발음한다고 지적한다. 또 ‘왜국’과 ‘외국’의 발음을 다르게 할 줄 모른다고 놀린다. 서울 사람들이라도 다 표준말을 쓰지 않고 대구 사람이라도 다 엉터리 발음을 하지 않는데 서울 가면 대구 사람들은 모두 다 엉터리 말을 쓰는 사람 치부한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 때 데모를 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간 적이 있는데, 같은 반 친구 중 하나가 ‘너는 대구 사람인데 왜 데모를 하는 거지?’라는 기상천외한 질문을 했다. 이 친구는 정치가 무슨 프로 야구시합이라도 되는 줄 알았나 보다. 전라도는 해태 김대중, 경남은 롯데 김영삼 그리고 박정희는 삼성 라이온즈라는 말인가. 그때 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잣대로 세상을 볼 뿐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유신 시절 대구 출신은 교도소 가고 죽은 사람은 있어도 덕 본 것은 거의 없다. 딱 하나 덕 본 것이 있다면 소위 사투리라고 괄시받던 대구 말이 유신 때는 멋있는 말로 취급을 받은 것이다. ‘군대서 표준말은 경상도 말이다’라는 속설이 있었다. 서슬 시퍼런 군인들이 무단정치(武斷政治)를 하니 자연 경상도 말 그중에서도 특히 대구 말이 많이 쓰였는지 모르겠다. 당시에 떠돌던 유언비어로 서울 중앙청 앞에 경상도 말 학원이 있다는 것인데, 특히 그중에도 대구 말 레슨비가 더 비싸다고 했다.
서울 사람이 대구 말을 흉내 낸다고 하지만 어림없다. 대구 말이 어려운 건 음의 높낮이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옛말이 그대로 쓰이는 것도 있어 흉내 내기 더 어렵다. “아이고 더워라”는 대구 말로는 “아이고 더버라”인데 ‘더버라’는 오늘날 한글로는 표현하지 못한다. ‘버’를 ‘순경음 비읍’(ㅸ)으로 써야 대구 말이 된다. 그리고 다슬기를 대구 말로는 ‘고디이’라고 하지만 이것 역시 표기가 옳지 않다. ‘이’는 ‘옛 이응’(훈민정음 28자모 가운데의 한 글자인 ㆁ)으로 써야 콧소리가 들어가는 ‘고디이’가 된다. 이렇게 마치 메소포타미아 말처럼 어려운 대구 말이므로 학원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많은 대구 사람이 서울에 살고 있지만, 서울말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언어 중추가 고정된 후 객지에 갔기 때문에 말이 안 되기도 하지만 대구의 자존심 때문이기도 하다. 반듯한 가정에는 고유의 김치와 된장이 있듯이 객지에 살아도 각자 제 고향 말을 지니고 사는 것이 고향 사랑이다. 그 사랑이 벽돌 한 개가 되고 결국 그것이 모여 애국이라는 큰 피라미드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권영재/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 |
기사 작성일 : 2015년 06월 11일 |
대구 구두닦이.(19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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