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25)구호물자

思美 2015. 9. 8.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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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25)구호물자

 

내가 적십자병원에 근무할 때 “고등학교 때 JRC(요즘은 RCY라고 하며 ‘청소년적십자’라는 뜻) 회원이었다”고 말하자 곁에 있던 직원들이 “원장님은 일찍부터 봉사활동을 하신 분이군요”라며 짐짓 놀라는 체했다. 사실 나는 심성이 그다지 훌륭하지 못해 봉사활동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사연이 있어 가입하였지 봉사하려는 마음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직원의 말에 가타부타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비겁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때는 그렇게 묵묵부답이 분위기상 좋을 듯싶었다.

이제 세월이 꽤 흘렀으므로 그 사연을 털어놓아도 크게 욕할 사람이 없을 것으로 믿고 부끄러운 내막을 말한다. 국민학교 다닐 때 외국에서 가끔 구호물자가 학교에 들어왔다. 청바지와 체크무늬 윗도리 등 입을 거리부터 고무공, 요요 등 각양각색의 장난감 그리고 예쁜 크리스마스카드와 초콜릿, 비스킷 같은 과자도 있었다. 당시 보리밥도 옳게 챙겨 먹지 못하던 때라 ‘이게 꿈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선물은 분량이 그렇게 많지 않아선지 담임 선생님은 우리 반 애들 모두에게 주지 않고 몇 사람에게만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외모만큼이나 고운 마음씨를 가진 처녀 선생님이 왜 나같이 우등생이고 잘생긴 애는 외면하고 성적도 나쁘고 옷도 해어진 것을 입고 코만 질질 흘리는 애들에게만 그런 좋은 선물을 주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중학교 시절까지도 구호품은 이어졌다. 이때는 외모가 후줄근한 학생들에게 주는 게 아니라 JRC 회원들에게만 주었다. 애가 단 우리는 JRC를 ‘지랄씨’라 불렀다. 그런다고 구호품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JRC에 들어갔다.

드디어 바다 건너온 멋있는 옷이나 맛있는 과자를 손에 쥘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 붉은 적십자 마크가 주님의 긴 십자가보다 몇 배나 우월하고 빛나 보였다. 드디어 첫 모임의 연락이 왔다. 내일 새벽에 빗자루를 들고 학교에 오라는 것이다. 기왕에 줄 구호품이면 쉽게 주면 될 텐데 왜 이러지 하며 학교에 갔다. 운동장에서 아무리 눈을 닦고 봐도 구호물자는커녕 그 비슷한 물건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구호물자가 없어졌다. 청소년적십자 회원은 봉사만 하게 된 것이다. 들고 온 빗자루로 학교 운동장만 쓸고 집에 왔다.

본의 아니게 1년 동안 빗자루를 들고 길거리도 쓸고 때로는 적십자 홍보도 다녔다. 막차를 탔다가 헛물만 켜고 만 것이다. 그 후 이 생각만 하면 어떨 때는 국제적십자사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물건에 현혹된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내가 청소년적십자에 있었다는 말을 하지 않고 지냈던 것이다.

개별 구호물자 말고 전교생에게 주어지는 구호물자는 따로 있었다. 전지분유다. 우유의 기름을 빼고 말려 가루로 만든 분유. 이 분유 덕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었다. 전쟁 때는 싸우느라 정신이 없던 정부나 UN이 휴전하고 나니까 국가재건을 위한 구호물자를 본격적으로 공급했다.

이때 공급된 전지분유는 전쟁 후에도 한참 공급됐다. 우윳가루 배급 주기 전날은 방송이 나왔다. 내일 배급이 있으니 각자 우윳가루를 담을 용기를 갖고 오라는 내용이다. 분유는 두꺼운 종이로 만든 드럼통에 담겨 있었다. 굶어 죽지 말라고 주는 구호품이므로 자주 배급됐다. 그러다 보니 귀찮은지 선생님들은 빠지고 반장들이 우윳가루를 퍼주었다. 마지막 드럼통 밑바닥의 것을 푸려면 머리를 거꾸로 박아야 하는데 이런 일을 하고 나면 반장들은 얼굴은 물론이고 상반신까지 온통 흰 우윳가루 범벅이 됐다. 그래도 즐거웠다. 비록 내 것은 아니어도 남에게 주는 것은 기뻤다.

피란민들은 이것이 주식이었겠지만 살림살이가 나은 집은 우윳가루가 구황(救荒)음식이 아니었다. 우윳가루는 설탕을 섞어 먹어야 제 맛이 난다. 그냥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면 별맛이 없다. 그런데 설탕이 귀해 구할 수가 없었다.

물기 있는 우윳가루를 도시락에 넣어 찌면 딱딱한 과자가 되는데, 돈 많은 집은 이 과자를 간식으로 먹었다. 야매(밀매의 일어)로 시중에 돌았던 분유는 이런 과자가 되어 길거리에서 많이 팔렸다. 과자 위에는 울긋불긋한 색소를 뿌려 예쁘게 만들어 팔았다. 애들은 엄마표 우유과자보다 길거리에서 파는 엉터리 우유과자를 돈 주고 사먹기도 했다.

국민학교 5학년쯤 되니까 나라 살림살이가 나아졌는지 학교에서 우유를 끓여 주었다. 졸업할 때까지 이렇게 우유급식을 했는데 맛이 없어 돈 많은 집 애들은 사카린이나 당원을 갖고 와서 우유에 넣어 먹었다. 그런 것을 넣으면 맨 우유와 그 맛의 차이는 천양지차다. 일부 철없는 애들은 설탕 넣은 우유를 자랑해 급식시간에 분위기가 많이 어색해지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학교에서 무슨 조치를 했겠지만 돈 없는 다수 애들은 그냥 참고 맛없는 우유를 목구멍에 넘겼다.

내 동생이 학교에 다닐 때 구호물자는 우윳가루에서 옥수수가루(옥분)로 바뀌었다. 그것도 쪄서 주었는데 아주 맛있었다. 지금도 우유 먹었는지 옥분 먹었는지 물어보면 대충 그 사람 나이를 알 수가 있고 또 우유에 사카린이라도 넣어 먹었다면 잘사는 집 아이였다는 것까지 알 수가 있다.

어느 날 뜨거운 우유를 1층 식당에 가서 받아 2층 우리 반까지 들고 오다가 넘어져 마룻바닥에 다 쏟은 일이 있었다. 당시 복도는 나무에 치자를 예쁘게 물들여 두었는데, 쏟긴 뜨거운 우유 때문에 치자물이 다 빠져버렸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가 화상을 입었는지, 다치지나 않았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다만 색이 벗겨진 복도에서 붉게 흘러나오는 치자물을 보며 환경미화 다 버려놨다고 우리를 꾸지람했다. 너무 미안했다. 도시락 못 싸온 애들한테는 한 끼니를 거르게 했으니 미안했고, 선생님께는 복도를 버려놨으니 죄송했다. 가난은 인권을 말아먹는다. 이래서 전쟁은 없어야 하나 보다.

권영재/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기사 작성일 : 2015년 07월 02일

 

 

분유끓이는 장면. (1954년 대구)

분유기다리는 아이들.

분유 나누어주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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