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26)약수터 | |
슬플 때 애가 타고 창자가 끊어지는 것은 비단 사람의 경우만이 아니다. 옛날 중국에 허진군이란 사람이 독 묻은 화살로 새끼 사슴 한 마리를 쏴서 잡았다. 이를 본 어미가 달려와 박힌 화살을 뽑아 보겠다고 한참 애썼지만 결국 어미도 지쳐 죽고 말았다고 한다. 어미의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어떤 사냥꾼이 원숭이 새끼 한 마리 잡아 배를 타고 양쯔강을 지나가는데 어미 원숭이가 꽥꽥 소리치며 강기슭 따라 몇 십리를 오다 죽었다. 이 어미의 배 속을 보니 애간장이 다 녹고 창자는 잘라져 있었다고 한다.
이런 시와 우화는 문학적 멋을 위해 과장한 것은 아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사실이다. 동생이라고 깔보던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6년 동안 망신당하고 설움 받았으니 어찌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편했으리오. 해방은 되었으나 4년 뒤 한국전쟁이 일어나 형이 동생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아우는 살던 동네를 불 지르고, 오랑캐는 아녀자를 겁탈하고 목숨을 앗아가는 세상. 그 시절 우리는 모두 통곡하며 살았다. 그 바람에 창자도 골병이 들어 항상 속이 쓰리고 더부룩하고 매슥거렸다.
1897년 처음 발매된 이래 2006년까지 109년 동안 총 78억 병을 판 활명수가 국내 최초 등록상품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이런 기록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애가 타고 간장이 녹고 창자가 끊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약 안 먹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 말이다. 1950, 60년대 떠돌이 약장수들의 주상품은 소화제였다. 양키시장이나 칠성시장 아래 신천에서 약을 팔았는데, 양키시장은 소규모 서양악기로 광고했고 신천에서는 대규모 판소리로 고객을 유인했다.
위가 붓거나 헐게 되면 소화불량 증상이 생기는데 당시 사람들은 먹은 게 위장에서 작은창자로 내려가지 못해서 증상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체했다’는 말을 썼다. 간혹 포장이 안 된 시골길을 덜컹거리며 버스를 타면 모두가 ‘체증이 다 내려간다’고 했다. 막힌 게 내려갔다는 말이다. 이런 착각을 이용한 사기꾼도 설쳐댔다. 만성 위장병 환자를 사람들이 보는 데서 입에 손을 넣어 오래된 음식 찌꺼기를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퉁퉁 불은 시래기 줄기나 오징어 다리 등 질긴 음식이 그들의 손에 들려 나왔다. 1960년대는 필리핀서 사기꾼까지 원정 와서 위장병 환자에게 막힌 하수구 뚫는 방법을 썼다.
하지만 대구는 양반의 도시였다. 남정네는 물론이고 여염집 부인들도 위장이 좋지 않다고 약장수 약 파는 데 기웃거리지 않았다. 더구나 사기꾼들이 퉁퉁 불은 오징어 다리를 끄집어내는 그런 곳에는 가지도 않았다. 소다도 먹지 않고 참고 견뎠다. 이런 것을 보고 어린 우리는 ‘인간이란 어려워도 참아야 양반이 되는구나’ 라는 교훈을 얻었다. 대신에 양가 규수들의 속앓이 치료법은 약수터 가는 것이다. 만성 위장병 환자들은 산속에 아예 집을 만들어 두고 그곳에서 머물며 치료했다.
달성군 화원읍에서 마비정을 지나면 비슬산에서 흘러내린 산맥 중 삼필봉과 함박산이 만나는 곳이 있다. 이 산중에 허름하게 비만 겨우 피할 수 있는 간이 건물이 있었다. 이곳에 위장병 환자 10여 명이 머물며 약수로 그들의 병을 치료했다. 앞산 달비골에도 이런 환자들이 머물며 치료하는 곳이 있었다. 그러나 중증 환자가 아닌 경우에는 약수터를 찾아다녔다. 병 증상에 따라 가는 곳이 달랐는데 속이 매슥거리고 먹먹한 사람들은 가창의 대한중석 탄광 뒷산에 잘 갔다. 나도 항상 위장병을 달고 살던 우리 어머니를 따라 그곳에 몇 번 간 적 있다. 그 약수터 물은 마시면 모두가 토하는 게 특징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중석을 스쳐 나온 물이어서 그 독성으로 그렇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모두들 속병 낫겠다고 열심히 마시고 토하고 또 마셨다. 호기심에 몇 모금 마셔봤지만 역해서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다. 다 토한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와 미역국을 먹고 속 차렸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들의 체증이 먹은 음식물이 위장을 막아서 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도동 약수터도 유명한 곳이었다. 불로동에서 불로천을 따라 팔공산으로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도동 측백나무 숲이 있다. 거기서 왼쪽으로 더 들어가면 평광동으로 개울이 굽어지기 전 산에 막히는 동네가 도동이다. 여기에 약수터가 있었다. 할머니 집이 불로동 고분군 아래 있어서 나는 주말이면 할머니 댁에서 자고 올 때가 잦았다. 문으로 내다보이는 촌길에는 약수터 가는 수많은 사람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그때는 동화사 가는 버스가 드물어 동촌까지 와서 걸어서 불로동에 오는 게 통상적이었다. 나도 호기심에 가끔 도동 약수터를 찾았는데 이곳 물은 별 자극이 없었다. 토하는 사람도 없었다. 물을 많이 먹고자 엿을 많이 먹었다. 지금은 대한중석이나 도동 약수터를 찾는 사람이 없다. 대한중석 쪽은 흔적도 없다. 도동 쪽에는 ‘약수 식당’이라는 집이 있는데 이곳이 옛날 그때를 추억게 하는 희미한 흔적이다.
의학이 발달하고 상식이 늘어난 요즘은 굳이 약수 마시고 위장병 낫고자 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제는 산속에서 생활하며 병 고치려는 사람도 줄어들고 깊은 산이나 계곡으로 물 마시러 가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러나 조그마한 동네 산이나 골짜기에 물 받으러 가는 사람은 많다. 예전에는 병 치료가 목적이 있었건만 지금은 병을 예방하려고 약수를 찾아다닌다. 인간은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가지 요소로 생성되었다고 하니 물을 찾아다니는 행동은 병과 관계없이 자신의 한 부분을 채우려는 행동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노파심일지 몰라도 검증되지 않은 물을 마시면 건강해지려다 오히려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다. 무릇 만병은 마음에서 비롯되므로 인간은 항상 그들의 마음을 갈고닦는 일이 최선의 예방이자 치료이다.
권영재/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 |
기사 작성일 : 2015년 07월 09일 도동 측백수림.(천연기념물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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