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27) 야구

思美 2015. 9. 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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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27) 야구

 

대구 어린이들은 말랑말랑한 정구공으로 ‘야구사이’를 먼저 배웠다. 투수는 없고 타자 스스로 공을 띄우고 나서, 손으로 그걸 쳤다. 마치 야구 연습 때 코치들이 수비 연습을 하도록 야수에게 노크볼 쳐주는 모습과 같았다. 나머지 규칙은 정규 야구와 같았는데 이 야구사이라는 말은 출처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이게 숙달되면 정식 야구를 시작했다. 요즘으로 치면 야구사이 하는 애들은 동네 ‘퓨처스리그’인 셈이다.

삼성라이온즈는 야구를 잘한다. 4시즌 내리 우승하고 올해도 정규시즌에서 1위(9일 기준)를 하고 있다. 야구를 잘 아는 친구에게 삼성이 왜 이렇게 야구를 잘하는가 물어보니, 그는 “삼성은 돈이 많은 회사라서 경기도 용인에 좋은 재활 훈련 센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선수가 다치면 곧바로 치료하고 그곳에서 재활을 위한 물리치료도 해준다. 또한 삼성은 부상에서 회복한 선수는 경산 볼파크에 데려가 2군에서 실전 감각을 익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 하나로 지금 삼성 야구를 설명할 수는 없다.

대구는 원래 야구의 도시였다. 한국 야구의 도입은 1905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대구 계성학교에서도 야구가 시작됐다. 1922년에는 대구 첫 공식 야구대회가 열려 대구고보, 희도학교, 해성학교 등 7개 팀이 참석하였고 동운정(지금의 중구 동인동) 야구장은 구경꾼과 응원단이 북 치고 꽹과리 치고 야단법석이었다. 그 잔치는 해성학교가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일제강점기 때 가슴 속에 천불이 난 국민에게 그나마 속 후련하게 하는 사람이 몇 있었다. 당시에 ‘떴다, 봐라 안창남이요, 굽어보니 엄복동이다’와 ‘호무랑(홈런) 이영민’이란 구호가 있었다. 이는 비행사, 자전거선수 그리고 야구선수의 이름이다. 이 가운데 홈런왕 이영민이 대구 사람이다. 그는 대구 계성고보를 다니다 서울 배재고보에 스카우트됐다. 1924년 전 조선 야구대회에서 그의 홈런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야구 열기가 이렇게 무르익어가자 대구에는 계성고보 외에도 대구고보, 대구상업학교 등도 야구부를 만들어 팀이 7개나 생겼다. 그리고 소학교 야구부도 10개나 만들어졌다. 이렇게 학원 야구로 시작한 야구팀이 나중에는 성인 야구로 성장해 1930년대는 대구 전매국, 경북도청, 대구부청, 남선전기 등 직장 야구팀까지 생겼다.

이런 대구 사람들의 야구 열기도 6`25전쟁을 겪으며 살기가 척박해지니 자연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린이는 가슴속에 대구 야구를 용케도 간직하고 있었다. 동네 꼬마들은 배는 고파도 야구는 곧잘 했다. 집안 형편이 나은 애들은 양키시장까지 가서 미제 중고 글러브를 샀다. 그 외 아이들은 맨손으로 야구를 했다. 동네 대항전을 할 때면 작게는 야구공에서부터 크게는 야구 글러브 따먹기도 했다.

대구 어린이들은 말랑말랑한 정구공으로 ‘야구사이’를 먼저 배웠다. 투수는 없고 타자 스스로 공을 띄우고 나서, 손으로 그걸 쳤다. 마치 야구 연습 때 코치들이 수비 연습을 하도록 야수에게 노크볼 쳐주는 모습과 같았다. 나머지 규칙은 정규 야구와 같았는데 이 야구사이라는 말은 출처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이게 숙달되면 정식 야구를 시작했다. 요즘으로 치면 야구사이 하는 애들은 동네 ‘퓨처스리그’인 셈이다.

이렇게 어린이들이 스스로 야구붐을 일으키자 여러 국민학교도 야구부를 재가동하거나 새로 창설했다. 대구국민학교, 칠성국민학교에 다시 야구부가 생겨나고 이어서 옥산국민학교, 중앙국민학교도 야구부가 생겼다. 경주서는 황남국민학교가 유명했는데, 이 학교는 자주 대구로 원정 경기를 왔다. 나는 중앙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우리 학교는 옥산국민학교와 같은 해에 야구부가 생겼다. 하지만 중앙국민학교는 어느 학교와 시합을 해도 항상 졌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한 번도 이겨본 일이 없었다.

우리는 야구 시합이 있을 때마다 종합운동장으로 동원됐다. 응원이라도 열심히 하면 이길 것 같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야구장은 그렇게도 가기 싫었다. 관중석이 지옥 같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좌석이 시멘트로 토대를 만들어 그 위에 플라스틱 좌석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순 흙으로 만든 둑이 운동장의 담이며 좌석이었다. 한참 열 내서 응원하다 보면 점점 아래로 미끄러졌다. 어떤 때는 앞자리 친구의 등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비라도 오면 난리가 났다. 안 그래도 미끄러운 둑이 빗물에 젖으면 아예 스키장처럼 되어 여기저기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렇게 야구장에서 아랫도리를 버려 오면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을 욕하지 않고 우리를 야단쳤다.

그렇게 시합만 하면 지던 중앙국민학교에서 훗날 이만수, 이승엽 같은 대선수가 나왔다. 과거 대구상고와 경북고의 야구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었다. 잠실야구장 1호 홈런은 류중일 삼성라이온즈 감독이 쳤는데, 그는 당시 겨우 고등학생이었다. 프로야구의 수많은 감독이 대구 사람이란 게 우연은 아니다.

1982년 3월 27일 한국 최초의 개막전 프로야구가 동대문구장에서 삼성과 MBC가 맞붙었다. 9회가 되어도 7대 7로 끝이 나지 않았다. 10회 연장전으로 갔다. 2사 만루 때 삼성 투수는 이선희, 그가 던진 공을 MBC 타자 이종도가 한국 프로야구 첫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만들었다. 삼성은 이날 7대 11로 졌다. 이선희는 그해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9회 초 OB 김유동에게 또 만루 홈런을 맞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운의 투수 이선희’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선희는 꿋꿋이 선수 생활을 명예롭게 마치고 투수코치로 삼성에 남았다. 그는 후배들을 지도했고, 삼성은 2002년 드디어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했다. 문자 그대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이다. 불명예를 명예로 바꾼 사나이. 진정한 대구 사나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날 삼성은 대구의 야구 역사와 수많은 시민과 선수들의 애환 위에 그 영광이 빛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살다가 죽고 죽었다가 사는 야구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인생을 배우게 되므로 삼성라이온즈와 시민은 공생관계이다.

권영재/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기사 작성일 : 2015년 07월 16일

 

2012년 7월 25일 대구야구장에서 이만수감독의 SK와 대결하는 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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