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29) 갓바위

思美 2015. 9. 8.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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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29) 갓바위

 

미국이 얼음 덩어리인 알래스카를 소련으로부터 샀다가 처음에는 굉장히 후회했다. 그곳이 아무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금이 발견되자 미국인들은 내남없이 알래스카를 외쳤다. 바위 덩어리에 둘러싸인 갓바위 부처님도 1천년을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스타가 됐다.

갓바위는 한자로는 관봉(冠峰)이라 쓴다. 대구 사람들이 ‘갓바위’라고 말할 때는 팔공산 동쪽 높이 850m의 관봉을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개 갓바위에 있는 부처님을 말한다. “갓바위 간다”고 할 때는 갓바위에 등산하러 가는 게 아니라 그곳에 있는 약사여래불을 뵈러 간다는 말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갓바위에 가려면 천로역정(天路歷程)이었다.

시내서 버스를 타고 공산면 백안삼거리까지 가서 다시 택시를 합승해서 갔다. 시내서 공산면까지도 멀었지만 백안삼거리에서 갓바위까지 10리 길은 짧아도 무척 힘든 길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처럼 차를 길길이 날뛰게 해 마치 미국 서부 목장에서 로데오 시합에 출전한 것 같았다. 머리는 차의 천장에 닿았다가 옆의 창문에 박았다. 몸은 몸대로 옆 사람 가슴에 안겼다가 다시 다리에 끼었다. 머리와 몸이 완전히 따로 놀았다. 이러다가는 부처님을 뵙기도 전에 저승부터 가는 게 아닌가 걱정되기도 했다.

부처님이 있는 관봉까지도 거리는 짧아도 가팔라서 힘이 들었다. 민첩한 청년들은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산길이나 나같이 육체가 어둔하고 미약한 사람은 두 시간씩 걸렸다. 시내에서 갓바위까지 가는 길은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가는 길처럼 멀고도 험난했다. 중생들이 이런 ‘고난의 행군’을 하고 올라오니 부처님은 한 가지의 복을 주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나 보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갓바위도 1960년대 말까지 찾는 사람이 없었다. 1980년대 초가 되어서야 너도나도 갓바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까지 갓바위는커녕 동촌 가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 무렵 살림살이가 넉넉한 집은 겨울에는 부곡온천 가고 여름에는 칠포해수욕장에 갔다. 서민들은 앞산이나 수성못에 갔다. 차츰 나라 살림살이가 넉넉해지자 바다와 산은 물론 그전까지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궁벽한 시골을 일부러 찾는 사람이 생겨났다. 허물어져 가는 산사(山寺)의 부처님을 찾아가는 사람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곳간이 차자 예절도 찾기 시작한 것이다. 큰 바위 아래 앉아 있는 늙은 미륵을 찾아 예불을 드렸다. 경상도 사람들은 예부터 돌로 만든 부처를 ‘부처 미륵’ 혹은 ‘미륵’이라 불렀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고 5억6천700만 년 뒤에 온다는 미륵. 기독교로 말하자면 ‘재림(再臨)예수’인 셈이다.  

무명이었던 관봉의 미륵 부처님도 그 무렵부터는 이름을 얻게 된다. 1960년대까지는 석조여래좌상이라 했다가 요즘은 약사여래불이라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중생제도(부처가 중생을 구제해서 불성을 깨닫게 하는 일) 할 때 근기(根機)에 맞게 설법하는 게 특기다. 공부 많이 한 사람에게는 수준 높은 강의를, 학문이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눈높이에 맞는 쉬운 가르침을 준다. 말을 만나면 말의 말로, 소를 만나면 소의 말로 수기설법(隨機說法)을 했다고 한다.

부처님은 병든 자에게는 의사로(약사여래), 지옥 앞에서는 수문장(지장보살)으로, 천국에서는 천사(아미타불)로, 세상살이에 시달리는 이에게는 천 개의 눈과 손으로 보살펴주는 엄마(관세음보살)로 나타난다. 약사여래는 왼손에 둥근 알약을 들고 있어야 하는데 갓바위 부처님은 그 알약이 없다. 그래서 어떤 이는 손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나 앉음새를 보면 석가모니 본존불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는 항공촬영하면 손바닥에 알약의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이렇게 전문가 사이에서 갓바위 부처님의 명칭에 대해 왈가왈부 말이 많다. 이런 시시비비는 학자들의 관심거리일 뿐, 중생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또한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약사여래도 자신이 부처님의 제자이면서 또한 자신이 석가여래인 것을 아는 탓에 그 이름에 대해 관심이 없다.

갓바위 부처님은 한때 그곳에 많이 와달라고 스님들이 전단을 뿌리고 다녔으니 세상일이란 염량세태로 이렇게 오고 가는 때가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갓바위가 전국에 그 이름을 막 떨치기 시작할 무렵 불교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도 팔공산 아래 많이 찾아갔다. 특히 애주가들이 그곳으로 많이 갔다. 애주가들은 술만 마시지 않는다. 술과 안주는 함께 팔린다. 술이 맛있어 간 김에 안주도 먹고 안주가 좋아 찾아가서 술도 마신다. 갓바위는 두부 안주가 유명했다.

불교에서는 꺼리는 탓에 주당들이 갓바위에 술 마시러 가자고 할 때는 “두부 먹으로 가자”고 말했다. ‘빈대도 낯짝이 있다는 말’처럼 아무리 주당이라도 부처님 계신 곳에 술 마시러 가자는 것은 좀 민망한 말이다. 나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이 사람은 참 미식가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두부를 공장에서 생산해야지 그 외 곳에서 만드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갓바위 아래에서는 시주용으로 두부를 만든다니까 묵인해 준 것 같았다. 갓바위 촌두부는 공장 두부와 맛이 천양지차였다. 외관은 ‘무대까리’로 생겼으나 ‘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갓바위 두부는 팔공산에서 자란 콩에다 그곳의 맑은 계곡물로 만들고, 게다가 부처님 가피를 입은 탓에 맛이 좋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갓바위는 성속(聖俗)이 어우러져 그곳이 바로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인 무분별의 세계인 니르바나였다. 산 아래 처사들은 두부와 막걸리에 취해 극락을 보고, 산 위의 중생들은 선본사 절밥 공양에서 행복을 느꼈다. 나는 그 암자의 짜기만한 무청 김치와 밥을 먹는 게 그리 탐탁지는 않은데 전국에서 몰려든 불자들은 그런 밥을 처음 먹어본 듯이 맛있게 먹었다. 신앙인들은 공양을 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 음복을 하는 것이니까 반찬하고 밥의 맛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닌 모양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성체를 받아먹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최근에는 갓바위에 노약자와 장애우들의 예불을 돕기 위한 케이블카를 설치한다는 말이 있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환경운동가들은 입에 거품을 품고 반대한다. 이 역시 바람직한 현상이다. 자연은 이렇게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너무 원리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스위스 알프스 산에도 케이블카가 있다는 현실 그리고 갓바위는 관광명소가 아닌 예불 장소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팔공산 무당골에는 골프장도 있는데 예불을 위한 시설이 왜 문제가 될까? 정말 시심마(是甚,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공안(公案)을 이르는 말. 인생의 모든 생활 현상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서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다.

권영재/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기사 작성일 : 2015년 07월 30일

팔공산 갓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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