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28) 오만이 | |
힘찬 군가가 울려 퍼지고 있다. 1970년 10월 어느 날, 부산항 제3부두에 정박한 미국 수송선 업셜호 위에서 주먹을 흔들며 군가를 부르는 맹호부대 상병 오만이는 울고 있었다. 부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이기고 돌아오라고 외치는 경남여고 학생들도 울고 있었다.
대구 동구 신천동 출신 오만이는 1969년 겨울에 입대했다. 그는 성서에 있는 육군 제50보병사단에서 신병교육을 받았는데, 추워서 얼어 죽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았다. 그는 배식을 받은 뒤 재빨리 먹고 다시 줄을 섰다. 이런 어설픈 행동이 보급관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한쪽으로 끌려가 얻어터지던 중 오만이의 말씨를 들은 중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고향이 어디냐?”라고 물었다. 오만이가 대구라고 답하자 기합은 중단됐다. 장교는 “내일부터는 한 번 더 타 먹도록. 대신 식판의 고춧가루는 철저히 지우고. 알았나?”라고 말하고 사건은 종결됐다. 그 장교는 자신도 대구 출신이라며 오만이 훈련병의 어깨를 두드리며 힘내라고 말했다.
오만이는 훈련을 마치고 G.O.P에 있는 부대에 자대 배치받았다. 배고픈 군생활은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20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배는 고팠다. 내무반 선임 중에는 월남전에 갔다가 온 이도 몇 있었다. 참전 군인들은 월남 갔다 오면 무조건 전방으로 배치됐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 중에 솔깃한 말은 월남 가면 배 터져 죽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귀국할 때는 한 사람당 한 개씩 ‘귀국박스’를 묵인해 준다는 것이었다. 월남 참전하면 봉급도 많고 밥도 배불리 먹는 데다 돌아올 때는 돈이 되는 선물도 챙길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었다. 단, 그것은 살아 돌아올 때 이야기이다.
굶어 죽으나 총 맞아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다. 오만이 상병은 월남전에 지원했다. 1965년 11월 14일 경북 포항서 청룡부대가 처음으로 전투병을 월남전에 투입했을 때 병사들은 서로 꽁무니를 뺐다.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남서 돌아온 병사들이 현금과 함께 귀국박스도 챙겨오니 나중에는 너도나도 월남전에 지원했다. 심지어는 돈을 주며 월남에 가기도 했다.
KBS는 매일 오후 9시만 되면 ‘파도를 넘어’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전장 편지를 읽어 주는 방송인데도 마치 파병부대가 월남에 휴양이라도 간 분위기였다. 남국의 야자수 그늘서 애인을 그리며 쓴 편지, 베트남 붕따우 휴양지에서 해수욕하며 쓴 편지, 대민지원 나가 칭찬받고 보람을 느낀다는 이야기 등 월남은 꿈의 나라였다. 방송 듣고 국민은 항상 이기기만 하는 국군이라 생각했다.
오만이 상병은 소대장의 통신병으로 월남전에 투입됐다. 무전기를 등에 메고 소대장을 따라다니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전투에 투입돼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베트콩이 출몰했다는 수색대의 연락을 받고 소대병력이 정글로 출동했다. “탕! 탕!”하고 총소리는 들렸건만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전투에 서툰 것도 있지만, 적 전술이 항상 그랬다. 여기저기 숨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총을 쏘았고, 지휘관을 먼저 노린다. 무전을 하던 소대장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곁을 보니 소대장은 어느새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파월 군인들은 강원도 화천군에 있는 오음리에서 파병 대비 실전훈련을 받았다. 그 부대의 이름은 ‘제7보충단’인데, 통상적으로 ‘오음리’ 또는 ‘7보단’이라 불렀다. 오만이가 그 부대에 간 첫날 저녁에 통닭 반 마리가 나왔다. 그 후 육군 정량에다 질 좋은 반찬이 계속 나왔다. 오만이는 ‘월남전에 지원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부터 혹독한 훈련이 시작됐다. 영화 세트장처럼 월남 가옥과 정글을 똑같이 만들어 둔 곳에서 실전과 같은 훈련을 했다. 개인화기도 최신 M16 소총이었다. 당시 국군은 6`25전쟁 때 미군에게 지급받은 무겁고 긴 M1 소총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신형 소총은 무게도 가볍고 자동으로 발사돼 병사들은 마음에 들어 했다. 마치 이 총이면 어떤 적이라도 다 무찌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만이는 고참이었고 실전 대비 훈련까지 받았다. 막상 실제 전투에서 상황이 벌어지니 배운 대로 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소대장의 죽음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적을 향해 총을 쏘았다. 무전병마저 죽으면 전투는 필패한다. 그러나 그는 야전교범을 어기고 총을 휘둘렀다. 만약 무전병이 죽으면 수많은 전우를 잃을 수도 있었다. 규정대로 하자면 그의 행동은 군사법원에 넘겨질 감이었다. 하지만 첫 전투에서 모두 제정신이 아니어서 무엇이 원칙이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아무도 챙기지 못했다.
첫 전투는 그렇게 끝났다. 그런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면서 오만이는 점점 전투에 능숙해졌고 살아남는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또한, 곁에서 수많은 전우가 죽는 것을 보았다. 부상으로 사지가 찢긴 병사, 내장이 튀어나온 장교 등 온갖 참혹한 광경을 보면서 정글을 누볐다. 생포된 베트콩을 불법으로 사살한 적도 있다. 그들도 그랬으리라. 파월 국군은 4천650명이 전사했다. 오만이는 병장으로 진급했고 죽지도 않았다. 1년 뒤 오만이는 자신의 집으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귀국했다.
많은 병사가 귀국박스를 갖고 왔다. 그 상자에는 선풍기, 텔레비전, 전축, 카메라, 이스트, 파리채, 가죽 장갑, 대검, 볼펜, 코카콜라, 일제 연필, 탄피 등이 주로 들어 있다. 오만이는 귀국박스 없이 돌아왔다. 돈이야 되겠지만 마치 그것 때문에 목숨을 담보로 했다는 오명을 남기기 싫었다. 다만 그의 윗주머니에는 베트콩에서 노획한 ‘勝利’(승리)라고 쓰인 만년필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그 파란 만년필은 40여 년간 간직한 참전 기념품이다. 만약 오만이가 죽었으면 그의 만년필이 공산군의 호주머니에 꽂혀 있었을 것이다. 현재 오만이는 포항에서 6만원의 참전수당과 정부에서 주는 고엽제 수당 38만8천원을 받으며 살고 있다. 고엽제 피해가 없는 사람들은 참전수당 18만원을 받는다. 고엽제 환자는 중복된다고 해서 참전수당은 받지 못한다. 돈이 너무 적다. 하지만 그는 애써 말한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남는 장사다. 안 죽고 돌아온 것 그게 어딘데…”라고.
권영재/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 |
기사 작성일 : 2015년 07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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