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30) 소풍 | |
1960년대 서울 가서 대구와 다른 풍습에 어리둥절하고 당황한 일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는 창덕궁 비원에 소풍 온 학생들을 보고 놀란 일이다. 우리 어릴 때는 소풍이라면 멀고 먼 곳을 걸어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원족(遠足)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학교 코앞에 있는 고궁에 소풍이라고 와서 앉아 있으니 ‘세상에 무슨 이런 원족도 다 있나?’ 하고 어리둥절했다. 내가 어릴 때는 내일 소풍 간다면 좋아하기보다 큰일 났다는 걱정부터 했다. 가는 곳이 멀까 봐 그랬다.
당시에는 소풍이란 말은 애들끼리 쓰는 말이고 학교에서는 원족이라는 말을 썼고 나중에는 야외학습이라고 하다가 한참 뒤에야 소풍으로 용어가 고정됐다. 소풍이란 공부에 시달리던 학생들이 머리를 식히러 야외에 나가서 바람을 쐬며 쉰다는 뜻인데도 선생님들은 교실에서 하던 수업을 야외에서 할 뿐이라고 애써 강조했다. 이렇게 세뇌돼 있었던 터라 서울 애들이 시내에 있는 궁궐에 소풍 온 모습을 보고 놀란 것이다. 당시 대구에서는 달성공원 같은 곳에 소풍을 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내 초등학교의 첫 소풍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난생처음 경험한 소풍인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는 목적지까지 오고 가느라 죽을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는 삼덕동에 있는 도립병원(경북의대 부속병원) 옆에 있었는데 여덟 살짜리 꼬마들이 거기서 중앙통을 거쳐 침산동으로 가서 검단동 뒷산까지 갔으니 그게 어디 군인들의 산악행군이지 무슨 소풍이란 말인가! 이런 무리한 교육은 아마도 일제 교육의 잔재였던 것 같다. 애들을 강하게 키운다고 일부러 소풍을 멀리 간 것 같다. 애들이 강해지기 전에 먼저 죽을 것 같았다.
그런 고난의 긴 행군 끝에 금호강이 발아래 보이는 검단동 뒷산에 도착했다. 우리는 좀 쉬었다가 다음 행사가 있을 줄 알았는데 숨 돌릴 틈도 없이 담임 선생님이 우리를 불러 모아 주위의 산과 강을 설명해주었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산, 반티산이다. 선생님은 멀리 강 건너 함지박을 뒤집어 놓은 듯한 그 산을 보고 함지산이라는 정식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고 속칭으로 산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어린애들이라 일부러 동네 사람들이 부르는 친숙한 이름으로 가르친 것인지 아니면 선생님 자신도 본이름을 몰랐던 것인지 모르겠다. 산과 강 설명이 끝나 이제는 도시락을 먹으려나 하는데 어림없는 일, 이제는 여기저기 다니며 산야초 이름을 알려주었다.
먼 거리를 걸어온 탓에 다리도 아프고 배는 고픈데 선생님의 야외 교육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그렇게 지루한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도시락을 먹었다. 그리고 수건 돌리기와 보물찾기를 했는데 행군의 피곤과 강제 교육, 그리고 식곤증으로 인해 그런 것들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야외수업이 된다고 생각하는 선생님들이 이상했다. 지루한 행사를 마친 뒤 또다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시내를 통과해 도립병원을 거쳐 학교에 왔다. 완전 파김치가 됐다. 진짜 원족 한 번 제대로 했다.
초등학교 소풍 행렬은 옛 중국이나 아랍국가의 군인 행군과 흡사했다. 그런 나라 군인들은 전투하다 이동할 때 가족들도 함께 다니며 철조망 너머로 쌀과 반찬을 얻어먹었으며 공생한다고 들었다. 학생들 행렬 옆과 뒤에는 가족들도 많이 따라오고 군것질 장수들도 많았다. 이는 마치 탱크 옆에 보병들이 따라붙는 모습과 흡사했다.
평소에는 먹을 것을 먼발치서 구경만 하다가 소풍 때면 아이들 입은 호사한다. 봄 소풍 때는 그해 첫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말은 봄 소풍이지만 그때는 아직 추위가 남아 찬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춥다. 계절 음식은 아니다. 하지만 단것이 귀한 시절이라 기온과 관계없이 아이스크림은 인기 최고의 주전부리였다. 이렇게 봄 소풍 때 아이스크림이 먼저 선을 보인 뒤 시내 구멍가게에서도 팔리기 시작했다.
평소 주머니가 텅 빈 부모님들이라도 이날 하루는 돈을 아끼지 않고 음식과 간식, 음료를 장만해준다. 소풍 가는 아이들은 장소나 주변 환경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오직 보따리 속에 든 과자와 음료수만 보물처럼 안고 다녔다. 당시 많은 학교는 배자못(대불지)으로 소풍을 갔다. 원족 때보다는 많이 짧아졌지만, 그 거리 역시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었다. 지금은 없어진 못인데 경북대학교 교정을 통과해 복현오거리에서 화랑교 쪽으로 가다가 오른쪽에 있었다. 그때는 강에 다리도 없고 허허벌판이었다. 야산인데 나무가 없어 못이 보인다는 것과, 시내를 벗어난다는 것이 몇 안 되는 이곳의 장점이었다.
시내서 배자못까지 가다 보면 그곳에 도착도 하기 전에 갖고 온 과자나 음료수는 사라졌다. 길이 멀고 힘이 드니까 오면서 다 먹어치운 탓이다. 막상 못 가에 앉으면 달랑 도시락 하나만 남아 있었다. 가난한 애들은 도시락이 없었다. 담임 선생님은 부모님들이 고맙다는 표시로 애들 편에 도시락을 보낸다. 이 도시락이 빈손으로 온 애들의 도시락이 됐다.
중학교에 가면서 배자못으로 가는 횟수는 줄고 효성여대 뒷산, 동촌 등 장소가 다양해졌다. 나는 그런 곳이 초등학교 때보다 거리가 짧아져 속으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요즘은 나들이 갈 때 너도나도 배낭을 메고 다니지만, 옛날에는 보자기에 싸서 다녔다. 보자기 속에는 사과가 그려진 애플사이다나 날개 달린 말이 그려진 천마사이다와 계란, 능금, 과자, 사탕 등이 짐의 전부였다. 중·고등학생들은 철이 들면서 그 보자기가 싫어 목이 말라도 참고 오직 도시락만 신문지에 싸서 소풍을 갔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화원유원지도 가고 경주도 갔다. 이때부터는 소풍도 어린 티를 벗어나 어른스러운 나들이가 됐다. 술도 숨겨 가고 숨어서 담배를 피웠다. 당시로서는 정학 내지는 퇴학감이었지만 선생님들은 눈감아 주었다. 자고로 술, 담배는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는 말이 있다. 비록 규칙은 어겼지만, 뒤탈은 없었으니 잘못한 행동이 그리 죄스럽지 않다. 이 원족 시절 학생들이 자라서 우리나라 경제개발의 일꾼이 됐다. 아마도 멀리 다녀 다리가 튼튼해져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 |
권영재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1972년 대구중앙국민학교 소풍.(6학년5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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