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32)금달래 | |
우리 동네 살던 에이코(英子)가 돌아왔다. 실성해서 나타났다. 동인 2가는 시내 중심지라 주로 관사와 큰 주택이 있던 곳이지만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빈터가 군데군데 있었다. 전쟁 후 그 빈터에는 ‘하꼬방’이 들어섰다. 주인들은 피란민도 있었고 원래 살던 원주민도 있었다. 1960년대가 되자 시내에 있던 그런 허술한 집은 재개발에 밀려 다 사라졌다. 에이코네도 그때 밀려나 어디론가 가버렸는데 그 에이코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녀의 이름이 일본식인 것은 일제강점기 때 태어났기 때문이다. 국민학교에 입학해서는 영자라고 했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에이코라고 불렀다.
에이코는 왜 제 살던 옛 동네에 나타난 것일까? 오랜만에 와서 누구를 찾을 생각도 않고 어느 집에도 가지 않았다. 어른들은 이미 훌쩍 커서 처녀가 되어 온 그녀가 반가운 눈치인 한편으로는 꺼리기도 하는 눈치였다. 입음 새가 남루하고 세안도 하지 않고 머리칼이 헝클어져 몰골이 추레해 보기 좋지 않았다. 얼굴은 어릴 때보다 더 예뻐졌지만 표정이 없고 말을 하지 않으니 기이한 느낌마저 들었다. 우리는 한때 같이 놀며 자란 동네 누나였지만 뭐라고 말을 붙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구일보사 옆 골목에 우두커니 서서 중얼거리며 먼 산만 쳐다보고 있거나 혹은 명성예식장 주위 식당 건물에 기대앉아 허연 허벅지를 걷어 올린 체 혼자 키득키득 웃고 앉아 있었다. 예전에 정 준 임이 잊혀 지지 않아 찾아온 걸까? 아니면 말벗이 그리워 되돌아온 것일까? 그녀는 그렇게 몇 달 우리 동네에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올 때처럼 말없이 가버렸다. 그 후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떠났기에 그녀가 고향에 온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동네 어른들은 그녀가 “필시 연애하다 망해서 충격받아 미쳤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어떤 어른은 금달래가 다시 나타난 것 같다며 일제강점기 대구서 살다 사라진 광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때 금달래 이야기를 처음 접했다. 금달래의 친정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시집을 무태로 왔다고 한다. 무태의 서변동과 동변동은 금호강이 감도는 산 좋고 물 좋은 동네다. 금달래는 동변동의 양반댁에 시집을 왔다고 한다. 그녀가 좋은 집에 시집을 온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 하나로 만족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시댁 식구들이 집을 비우면 머슴을 꼬드겨 관계를 맺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그런 일이 잦아지자 결국은 집안에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른들이 금달래를 집에서 쫓아내었다는 것이 대강의 내용이다.
어떤 이들은 “시어머니가 하도 모질게 시집살이를 시키니까 정신병이 생기고 그 증상으로 아랫것들과 붙어먹게 되었다”고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비록 신분 차이는 있을지언정 머슴과 정분을 트게 되자 이룰 수 없는 사랑 그 고통 끝에 정신병을 얻게 되고 결국은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말도 했다. 아무튼 금달래의 주된 정신병 증상은 남자라면 아무나 가리지 않고 육체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처음 시댁에서 쫓겨나서는 가까운 무태 소깝시장에서 남자들을 홀리며 다니다가 나중에는 시내로 진출해 서문시장에 자주 나타나 온갖 남자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대구 남자들은 어중이떠중이도 다 금달래를 알았다고 하니 금달래의 치솟았던 인기를 가늠할 수가 있다.
정신병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이 된다. 그중에서 심리학적으로 풀이하면 억압되어 있던 무의식이 의식으로 튀어나온 현상을 정신병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무의식의 주된 재료는 성과 공격성이라고 한다. “열 남자 싫어하지 않는 여자는 없다”는 옛말이 있다. 겉은 요조숙녀처럼 보이는 여자라도 속으로는 화냥기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남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평소 억눌려 있던 본능적 욕구인 무의식이 그것을 통제하고 있던 자아의 힘이 약해지면 성적인 요소와 공격적인 요소가 행동화를 하게 되는 것이다.
정신병 환자가 부끄러워하지 않고 성적인 욕구를 채우려 하는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만 그 사람이 때와 장소를 가릴 줄 모르고 자신의 욕구를 만족하려고 하기 때문에 환자로 치부되는 것이지 그 욕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금달래는 한창나이의 젊은 여자인데다 예쁘고 매력적이었다고 하는 걸 보면 꼬리를 치지 않고 가만있어도 남자들이 꼬여 들었을 것이다. 병이 들어 본능을 통제할 줄 모르고 현실을 파악 못 해 아무 남자하고 어울리는 여자. 이런 여자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성적으로 짓밟고 학대한 남자들이 볼일을 다 보고는 그녀를 미쳤다고 비웃고 욕한다.
1986년도에 당시 최고의 미녀 배우 금보라가 주연한 ‘금달래’란 영화가 개봉했다. 사실 그 영화는 금달래와는 아무 관계없는 내용이다. 전설적인 미녀 광인(狂人) 금달래 이야기를 흥미 위주로 사실과 관계없이 만든 영화이다. 관객들이 금달래를 제멋대로 비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 바람에 멋모르는 사람들은 예쁘고 착한 여자였던 금달래를 ‘미친 여자’로만 기억하는 계기가 됐다. 요즘 세상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사자 인권훼손을 한 것이다. 고발감이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할아버지는 당시 동구 신암동에 있던 대구측후소(현 대구기상지청) 인근에 살았는데 그 동네에 금달래가 밤이면 자러 왔다고 한다. ‘동쪽에서 밥 먹고 서쪽에서 잠잔다’(東家食西家宿)는 말처럼 그녀의 잠자리는 인가의 부엌이나 처마 밑이었고 밥도 그 집에서 주는 대로 먹었다. 동네 사람들은 마치 시내에서 일 마치고 퇴근한 누이처럼 그녀를 대했고 스스럼없이 어울렸다고 한다. 성격이 온순하고 얼굴도 예뻤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토록 부평초 같은 한 젊은 여성을 보듬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이용하고 짓밟고 나서는 돌아서서 모두를 미쳤다며 손가락질하던 당시 대구 사람들이 비겁하다.
금달래는 해방 뒤에는 대구서 보았다는 사람이 없다. 만주에서 개장사하던 대구 사람들이 봉천에서 그녀를 몇 번 보았다는 이야기가 마지막 목격담이다. 간혹 대구서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우리 동네 에이코 같은 사람들을 보고 하는 소리일 것이다. 참 대구 사람도 여러 가지다. | |
권영재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기사 작성일 : 2015년 08월 20일 |
옛 명성예식장건물에 들어선 문화교회와 그옆 둥굴관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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