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34)10·1 사건 | |
무장 경찰관들이 화장터(지금의 대구 중구 남산4동 주민센터 옆 공원) 화구(火口)에 숨어서 언덕의 적을 향해 총을 쐈다. 무장 괴한들도 언덕 위에서 경찰을 향해 총을 쐈다. 경찰들은 독이 올라 있었다. 자신들의 처자식이 저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했고 동료 또한 여럿이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무장 괴한들은 소방관도 죽였다. 괴한들은 소방관들이 망루에서 자신들의 움직임을 경찰에게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46년 10월은 대한민국 경찰이 대구에서 무장 괴한들의 총에 맞아 죽은 달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은 해방의 영광된 날을 맞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대구에는 비극이 시작됐다. 해방 한 달여 뒤인 9월 29일 대구역에서는 만주와 일본에서 귀향하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던 열차가 구내에서 충돌해 72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있었다. 아비규환의 참극이 벌어졌다. 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은 혼자 오지 않는다는 뜻),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상처가 가라앉기도 전에 대구경북에 콜레라가 만연해 많은 환자가 생기고 1만4천여 명이 죽었다. 미 군정은 병 확산을 막고자 대구를 봉쇄했다. 안 그래도 미 군정의 쌀 배급정책이 실패해 굶주리고 있던 대구 시민들은 봉쇄에 의해 아사 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나 돈 많은 사람들은 굶지 않았다. 배부른 사람 중에는 친일파들과 고위공무원들이 많았다. 대구 시민들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1946년 5월 15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조선공산당 인사들이 정판사에서 약 1천200만원어치의 위조지폐를 찍어 유포한 사실이 드러났으며, 관련자들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조선공산당의 활동 자금 마련과 남한 경제의 교란을 동시에 추구하려고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경찰의 주장이었고, 조선공산당은 조작 사건이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일제강점기부터 공산주의자가 많아 한국의 크렘린이라는 별명이 있던 대구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박헌영이 지휘하는 공산당원들은 독을 품고 정부에 대항했다. 그들은 ‘신전술’이라는 투쟁 방식을 채택해 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1945년에 결성된 조선공산당 산하의 노동운동단체)가 9월에 철도 노동자와 운송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파업을 하도록 유도했다.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9월 총파업은 대구에서는 23일부터 시작됐고 10월 1일까지 계속됐다.
대구에서 박헌영의 축전이 낭독된 후 이 모임은 바로 미 군정에 대한 항거로 발전했다. 오전 10시 철도 노동자 500명이 공회당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다가 대구부청으로 가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시체 2구를 들것에 들고 나타났다. 그 시체는 시위하던 중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노동자 황말용과 김종태라고 했다. 그러나 정부 측 인사들은 이 시체가 대구의전 학생들의 실습용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다음 날 흥분한 대구시민들과 학생 1만여 명이 대구경찰서로 몰려가 경찰이 사건을 사과하고 발포자를 처벌하라고 외치며 쌀을 달라고 고함질렀다. 조선공산당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들이 경찰서 접수를 시도하자 흥분한 시민들도 투석을 시작했다. 젊은 공산당원들은 경찰서의 무기고를 부수고 총기를 탈취했다. 이 무장 공산당원들은 거리로 나가 폭력을 휘두르며 경찰관의 집이거나 부잣집이라 지목되면 무조건 때려 부수고 가구와 돈을 들고 나왔다. 쌀 말이라도 재어 두고 먹던 사람이라면 그래도 덜 억울하겠지만, 시민들과 함께 굶주리고 있던 말단 순경들이나 헛소문만 난 부잣집 사람들이 억울하게 맞아 죽거나 약탈당했다.
10월 2일 오후 7시 대구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미군이 전차를 동원하자 공산당원들은 도망갔다. 겉으로는 대구가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무기를 든 이들은 만만하게 물러가지 않았다. 시내 곳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10월 3일 대구 시내의 큰 소요는 대충 가라앉았다. 그러나 사태가 비록 대구에서는 진정되어 갔지만, 경북의 다른 곳으로 번져나갔다.
영천에서는 시위대 1만여 명이 경찰서를 습격하고 군수, 경찰, 관리 등을 죽였다. 이 사태 탓에 가옥 1천200여 호가 불타고 사망자가 40명이나 생겼다. 선산에서는 박상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가 주동해서 ‘선산인민위원회 보안서’ 현판을 걸고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 우익인사, 부호들을 감금하고 재산을 파괴했다. 칠곡군에서는 약목지서를 습격해 경찰관 3명을 살해하고, 왜관경찰서를 공격해서 경찰관 4명을 죽였다. 이때 장석한 칠곡경찰서장은 얼굴이 난도질당하고 머리부터 밑으로 갈라져 살해당했다. 예천, 경주, 영주, 문경 등 경북 모든 지역으로 사태가 번져나갔다.
대구의 사건은 경북으로, 또다시 경남을 거쳐 충청, 전라까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이 사태는 1946년 말쯤 겨우 수습됐다. 폭동을 일으켰던 이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거나 월북했다. 1961년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 황태성도 박상희의 친구로 선산 폭동 후에 월북한 인사이다.
대구에서 1946년 10월 1일 일어난 일을 한쪽에서는 ‘10월 항쟁’이라고 부르며 ‘동학농민운동’ ‘3·1운동’과 함께 3대 민중항쟁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쪽에서는 ‘10월 폭동’이라 부르고, 그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10·1 사건’이라고 부른다.
대구 시민을 수구꼴통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을 평할 때 순간적인 모습만 보고 말하면 안 된다. 해방 후 최초로 일어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 대구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주동자들은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하던 대구 공산주의자들이다. 개발독재 시절을 거치며 대구 사람들이 한쪽에 치우친 모습만 보고 다른 지역 사람들은 대구 사람들이 원래 그런 줄 알고 있다. 대구는 두 개의 날개를 숨기고 있는 거대한 붕(鵬)새다. 시대에 따라 어느 한쪽 날개를 펄럭일 뿐이지 외날개를 가진 그런 시시한 도시가 아니다. 명심할 일은 시대에 따라 어떤 이데올로기를 펼치더라도 절대로 힘없는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행동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 |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기사 작성일 : 2015년 09월 03일 |
1946년 10월 좌익에서 작성한 대구시인민위원회를 결성한다는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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