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31) 먹기우

思美 2015. 9. 8.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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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31) 먹기우

 

낙동강 사람들은 겨울 철새를 기우라고 불렀다. 술집에서 손님들이 소주 한 병 달라고 할 때 ‘진로’ 한 병 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먹기우의 ‘먹’은 검다는 뜻이다. 먹기우라는 말은 좁게는 검은 거위지만 광범위하게는 모든 검은 오릿과 철새를 부르는 낙동강식 호칭이었다.

삼국시대 신라의 김춘추가 고구려에 협상하러 갈 때 통역을 데리고 갔다고 한다. 송두율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의 말대로 내재적 접근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이 대목에 유의해야 한다. 당시 세 나라는 서로 다른 말을 썼기에 같은 민족이었는가도 의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국수주의자들은 삼국의 싸움을 동족상잔이라고 본다. 지금도 제주 방언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렵다. 1960년대 낙동강 주민들이 쓰던 ‘먹기우’라는 말은 요즘 타 지역 사람은 물론 경상도에서도 알아듣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도 나이 든 사람들은 거위를 ‘기우’라고 부른다.

1950년대 국민학교 국어책에 ‘윤회와 거위’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길 가던 손님 윤회가 머물던 주인집에 구슬이 없어졌다. 주인은 필시 나그네의 짓이라 여기고 윤회를 기둥에 묶었다. 윤회는 그 집 거위도 자기 옆에 묶어달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거위의 똥에서 구슬이 나오자 주인은 과객에게 미안해서 고개를 못 들고 하는 말이 “어젯밤에 진작 거위가 구슬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왜 하지 않았소?”라고 말하자 윤회는 “그럼 성질 급한 당신은 거위를 죽였을 것 아니오”라고 답했다고 한다. 요즘은 드문 일이지만 거위는 새인데도 개처럼 집 지키는 데 쓰였다. 이놈은 성질이 사나워 낯선 사람이 집에 오면 목청 높여 소리 지르고, 긴 목을 땅바닥에 붙여 상대를 공격한다. 부잣집에서는 거위가 이렇게 많이 길러졌다.

낙동강 사람들은 겨울 철새를 기우라고 불렀다. 술집에서 손님들이 소주 한 병 달라고 할 때 ‘진로’ 한 병 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먹기우의 ‘먹’은 검다는 뜻이다. 먹기우라는 말은 좁게는 검은 거위지만 광범위하게는 모든 검은 오릿과 철새를 부르는 낙동강식 호칭이었다.

요즘 겨울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곳은 천수만과 순천만 그리고 낙동강 하류지만, 내가 어릴 때는 우리 강산 모든 곳이 철새 도래지였다. 낙동강변 주민들은 그 강물을 떠와서 그냥 마셨다. 이 시절에는 자연보호니 천연기념물이니 하는 용어가 아예 없었다. 낙동강 하류에는 겨울이 되면 큰고니, 큰기러기,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뿔논병아리, 노랑부리저어새, 민물가마우지 등이 찾아왔다. 옛날 낙동강변 사람들은 이 모든 겨울 철새를 오리라고 불렀다. 조금 더 세분하면 검은 오리와 흰 오리 정도로 불렀다. 배움이 짧은 사람들은 오리를 기우라고도 불렀다. 거위는 원래 고니의 한 종류였다가 사람들이 집에서 길러 날지 못하는 종류가 되고 이름도 거위가 된 것이다. 재두루미를 먹기우라 부르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지금도 선산 해평 낙동강에 가면 재두루미가 겨울에 찾아온다. 그놈들을 먹기우라고 불러야 한다. 하지만 옛 낙동강변 사람들은 새 이름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당시에는 사람들도 양반, 상놈밖에 구별되지 않는 판에 새는 새였지 사람처럼 이렇게 저렇게 분류될 그런 고귀한 짐승은 아니었다.

요즘은 마루 밑에서 신발이나 물어뜯던 개가 안방에서 개껌을 씹으며 산다. 새도 어떤 놈은 천연기념물이라며 아낌을 받는다. 옛날에는 오직 사람만 귀했고 짐승이나 산야초는 감히 천연기념물이 되고 보호종이 될 수 없었다. 요즘 길거리나 차 안에서 옷 입은 개를 신줏단지처럼 안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사람도 저렇게 섬기고 살고 있을까?’라는 상념이 들 때도 있다. 옛날 대구경북 사람들이 짐승이나 물고기를 먹고 싶은 대로 잡아먹고 또 산이나 강에서 흐르는 물은 어디서나 그냥 퍼마셔도 좋기만 했던 시절이 에덴동산 시절이라고 생각해볼 때가 있다.

낙동강 물을 그냥 퍼마시고 모든 겨울 물새가 다 기우이던 시절 강변 사람들이 기러기 잡던 광경을 그려 보자. 추운 겨울 밤 호롱 불빛 아래 동네 남정네 몇이 모여 앉아 실하고 굵은 마른 멸치를 몇 마리 골라 옆에 두고 싸리나무 꼬챙이를 멸치 길이만큼 잘라서 몸통보다 가늘게 깎는다. 싸리나무 꼬챙이가 다 깎이면 멸치 대가리에서 꽁지 쪽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는다. 이렇게 장만한 미끼에 굵은 실을 단단하게 묶은 다음 그 줄을 길게 늘어뜨려 낙동강에 던져 넣는다. 그리고 날이 밝기를 기다린다.

옛날 낙동강은 얼기도 잘 얼었다. 밤새 강이 쩡쩡 크게 우는 소리를 내며 언다. 다음 날 아침 강에 나가보면 강심은 꽁꽁 얼어 있어도 강변은 아직 물이 흘러 어젯밤 띄워 놓은 멸치가 둥둥 떠있다. 강 아래위를 훑다 보면 운 좋은 날은 기러기가 걸려 퍼덕거리고 있다. 배고픈 철새가 맛있어 보이는 멸치를 꿀꺽하다가 목에 걸린 것이다. 멸치 몸속의 싸리 꼬챙이가 기러기의 목에 걸려 새는 아파 날지도 못하고 퍼덕거리기만 한다. 이렇게 잡은 기러기를 삶아 동네 사람들이 둘러앉아 국물은 들이마시고 고기는 뜯어 먹는다.

어린 시절 달성군 하빈면 낙동강가에 살았던 친척 집에 가보면 능금나무 아래에 구덩이를 파두었다. 그게 그 집의 우물이다. 목마르다고 하면 낙엽이 둥둥 떠 있고 개구리가 헤엄치는 그 웅덩이의 물을 떠주었다. 낙엽과 개구리를 보고는 차마 그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마루는 온통 하얀 모래투성이다. 밥을 먹어도 모래가 씹힌다. 우리 같은 애들은 모래 먹으면 맹장염 걸린다고 무서워하면서도 아저씨 눈치가 보여 억지로 그 모래 밥을 먹었다. 나중에 커서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라는 시를 읽다가 ‘이 사람 정말 강변 집에 가본 일이나 있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친척 아저씨 집은 사과 농사를 지으며 밭에는 땅콩과 고구마를 심어 팔았다. 모래밭이어서 고구마가 잘 열렸지만 아무 맛이 없었다. 사과도 그 꼴이었다. 고구마와 사과는 싼값에도 잘 팔리지 않았다. 하지만 땅콩은 크고 맛이 있었다. 그 땅콩을 시내에 있는 우리 집에 몇 가마니씩 갖다 놓고 팔았다. 그 통에 나의 겨울은 땅콩으로 황홀했다.

먹기우를 잡아먹던 시절 낙동강에는 둑이 없었다. 장마만 지면 강둑이 떠내려갔다. 그 둑은 엿장수들의 가위에 판엿이 떨어져 나가듯 그렇게 물에 싹둑 잘라져 나갔다. 어떤 이는 평생 일해서 만든 과수원이 하루아침에 통째로 강물에 떠내려간 일도 있었다. 강 하류에는 초가지붕, 수박, 개, 돼지 등이 떠내려가고, 강변에는 이런 것들을 건지겠다고 강물에 줄 매단 갈고리를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보는 사람들은 재미있는 풍경이었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빈면은 사육신 박팽년 선생의 고향이고 또한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고향이다. 이런 부유한 집은 멸치로 잡은 기러기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인(常人)들은 낙동강 물을 퍼마시고 철새를 잡아먹었다. 지금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가난은 어떤 참혹한 일도 저지르게 한다. 낙동강변 사람들은 가난했지만 그들의 심성은 풍성하고 착했다.

권영재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기사 작성일 : 2015년 08월 13일

 

->달성군 하빈면 묘골마을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박팽년의 후손들이 사는 마을이다. 박팽년의 고향은 아니다.

 

묘골마을 육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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