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9) 소피아 수녀

思美 2015. 9. 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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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9) 소피아 수녀

 

최분이 할머니는 남자같이 생겼다. 나는 가끔 혼자 웃으며 ‘할매가 정말 수녀 되길 잘했다. 그런 외모에 미스코리아나 연예인이 될 수 있었겠나. 수도자가 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내일모레가 80세이니 옛날식으로 말하자면 상노인이다. 아직 은퇴하지 않고 마산 진동에서 ‘술꾼과 정신장애인’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원생들은 ‘최소피아’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이 할매를 ‘왕초’ ‘깡패’ ‘할마시’ 등 불경스러운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소피아 수녀가 아직도 옛 솜씨가 나오려나 모르겠지만, 전에는 술 취해서 주정을 부리는 술꾼들에게는 바로 태권도 솜씨가 나왔다. 사실 태권도라고 해도 심형래의 ‘펭귄 발차기’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힘없는 발차기에 모두가 쓰러진다. 아마도 야훼 하느님의 장풍(掌風)이 그녀의 뒤에서 불어서 그런가 보다.

소피아 수녀는 1989년 대구 교동시장 입구에 무료급식소를 차렸다. 대구는 바로 그런 곳이다. 국채보상운동, 10`1 사건, 2·28학생운동 등 뭔가 떠들썩한 일이 시작되는 곳은 대구다. 무료급식소도 대구가 선두주자 중 하나였다. 그녀가 6·25전쟁 때 고향에서 거지들에게 된장과 고추장을 퍼주다 모친에게 야단을 맞았듯이 급식소 일을 시작할 때도 포항예수성심시녀회에서는 “불쌍하다고 어떻게 다 도와준다 말이오”라고 꾸중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인데도 이렇게 갈 길이 험하다.

소피아 수녀는 대구시립희망원에서 잔뼈가 굵었다. 주방일을 하면서 원생들을 보신시킨다고 마당에 지렁이, 개 그리고 오리를 키웠다. 내가 처음 희망원에 갔을 때 동쪽 문 부근에 커다란 퇴비 산이 있었는데 그게 원생들이 농사일하는 데 쓰는 거름무더기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거기엔 지렁이가 살고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토룡탕을 만든다고 소피아 수녀가 만든 지렁이 배양장이었다. 희망원 안에도 의사가 있고 약도 있었으며, 중환자는 병원에 이송을 하면 된다. 하지만 소피아 수녀는 그런 양방만이 치료가 아니라며 굳이 자신의 대체 치료법을 고집했다. 나는 속으로 무식한 방법이라고 비웃었다. 나중에 그녀의 속내를 알고부터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환자에게 사랑 없는 영양제 주사보다 팔다리를 주물러 주며 먹여 주는 지렁이탕이 훨씬 더 치료에 효과적이란 생각 때문이다.

그녀는 희망원을 나와 급식소를 시작했지만 그게 엿장수 마음대로 잘되진 않았다. 그 많은 사람의 식사를 마련한다는 것은 토룡탕 만드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적은 있었다. 한번은 다음 날 급식할 쌀이 떨어져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한밤중 누군가 대문을 두드려 문을 여니 트럭이 서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쌀 열 가마니를 갖고 온 것이다. 소피아 수녀는 쌀가마니를 부여안고 한참 울었다고 했다. 이런 기적은 그날만이 아니었다. 거의 매일 새벽에 쌀과 생선, 헌 옷, 푸성귀를 말없이 놔두고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대구 사람들의 속내를 보는 순간이다.

어느 날 소피아 수녀가 나에게 찾아왔다. 화가 나서 급식소를 못해 먹겠다는 것이다. 급식소는 허약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나 노인네들을 중심으로 무료 급식이나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생각과 다르게 흘러간다고 했다. 그녀는 “사지 멀쩡한 놈들이 대낮부터 술에 취해 와서 밥 먹고 앉아 있는 꼴을 보면 주먹이 운다”고 했다. 급식은 점심만 하는 것인데 한밤중에 문을 두드려 나가보면 주정뱅이가 밥 달라고 고함을 지른다는 것이다. ‘이런 놈들 미워 더는 급식소 할 마음이 안 난다’라는 게 요지였다.

소피아 수녀가 속한 예수성심시녀회의 총원은 대구에 있다. 원래는 1935년 영천에서 시작해 1950년 포항으로 갔다가 1992년 대구 남구로 옮겼다. 이곳은 ‘주님 손안의 연장’이 되기를 맹세하고 믿음과 겸손으로 기다리는 시녀가 되는 것이 기본 철학이라고 한다. 나는 소피아 수녀를 볼 때마다 ‘시녀’라기보다는 ‘남자 시종’의 느낌을 받는다. 산적 같은 외모와 투박한 말씨, 호탕한 웃음도 그렇지만 그녀는 박력 있고 진취적인 삶을 살았다.

산전수전을 겪는 동안 소피아 수녀는 수행의 도가 점점 높아져 예수성심의 사랑을 전하는 수녀로부터 소외당한 이들을 섬기는 경지에 이른다. 소피아 수녀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의 마음은 변해 있었다. 그렇게나 밉던 주정뱅이들이 어느덧 가족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이런 심경의 변화가 생기자 소피아 수녀는 급식소를 후배 수녀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그 주정뱅이들을 데리고 성주의 산골짜기로 들어가 ‘평화의 골짜기’를 만들었다. 집은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고 일부러 소피아 수녀와 술꾼들이 함께 지었다.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말이 쉽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술꾼들이 쌀 사러 가서 쌀값으로 술 마시고, 술 취하면 숙소에서 싸움질하고, 똥 싸고 토하고 행패를 부렸단다. 동네 사람들은 정신질환자를 노골적으로 멸시했다. 하느님의 시험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미운 정이 쌓여갔다. 될 것 같지 않던 건물도 완성되고 싸우고 난리를 부리는 생활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 그 나름대로 질서가 잡히고 자신들의 행동이 고쳐지지는 않아도 고쳐야 할 장애라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녀들은 10년이면 그들의 임지를 떠나야 한다. 지금 소피아 수녀는 자신에게는 마지막 임지가 될지도 모르는 마산 진동에 있다. 그녀가 반평생을 동고동락한 주정뱅이, 정신질환자들과 얼마나 더 함께 살다가 하느님 곁으로 가게 될까. 내가 마산에서 마지막으로 본 소피아 수녀는 늙은 할머니였다. 내가 사탕이라도 사서 드시라며 용돈을 조금 드렸는데 이 할매는 “수녀가 무슨 돈이 필요하냐”며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른다. 그렇다고 돈을 돌려주기도 뭣하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보다 못한 직원이 “그럼 공금으로 넣으세요”라고 충고해 겨우 어색한 자리가 무마되었다. 대구로 돌아오며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천사를 만났기 때문이다. 예쁘지도 젊지도 않은 천사. 살결도 뽀얗지 않고 검고 쭈글쭈글한 천사.

권영재(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기사 작성일 : 2015년 05월 14일

 

예수성심시녀회에서 운영중인 대구 요셉의집(무료급식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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