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7) 옥양목 | |
대구의 섬유공장은 규모도 크지만 역사도 깊다. 근대 대구 섬유공장은 1905년 추인호 사장의 ‘동양염직소’로 시작된다. 인교동에서 작게 시작한 공장이 나중에는 칠성동과 침산동 일대를 뒤덮게 된다. 이 동네는 대구역이 가깝고 인구 밀집지대여서 판매라 운반이 편리하고 직원모집도 쉬웠기 때문이다. 대한방직, 내외방직, 삼호방직, 금성방직 등 큰 공장이 한국 면직계를 주름잡았다. 1950년대부터는 화학 섬유가 출현한다. 비로드, 나일론 등이다. 1954년 이병철 사장이 제일모직을 창업해 모직시대를 문 열었고, 1957년에는 이원만 사장이 한국나일론을 만들어 대구는 면직`모직에 화학섬유가 가세해 전국을 뒤덮는 거대한 섬유계의 봉황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더불어 가내 수공업급의 작은 공장도 많았다. 이들은 신천동, 달성동, 상동 등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돈 좀 있는 사람들은 부드럽고 섬세한 실로 짠 ‘포플린’이나 ‘옥양목’을 입고 다녔다. 돈이 더 있는 사람들은 ‘비로드’(벨 루트`면사인데 나중에 화학섬유로도 나옴)라고 불리는 고급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반면에 몹시 가난한 사람들이나 시골 사람들은 삼배나 모시옷을 입고 다녔다. 그렇게 많은 섬유공장이 실을 만들고 옷감을 만들었지만, 막상 대구의 가난한 서민은 입을 옷이 없었다.
지리산 골짜기 어느 농가, 깊은 밤 두 아이가 호롱불 아래서 깊은 고민을 하고 앉아 있었다. 이들은 아재비와 조카 사이인데 할아버지가 중학교에 가지 못 하게 한다. 할아버지의 맏아들이 ‘빨갱이’ 놀음하다 죽었기 때문이다. 동네서 학교 다니고 공부 잘하는 놈들은 모두가 ‘빨갱이’ 가 되어 죽거나 월북해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꼴을 하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중학 진학 대신 할아버지는 ‘사지 바지’(shaggy pants`미군용 모직 바지)를 한 벌씩 사준다고 했다. 시골의 무명 핫바지는 겨울엔 입은 둥 만 둥이다. 그러나 사지는 두텁고 털로 되어 있어 정말 따뜻했다. 겨울 산에 나무하러 갈 때 입으면 추운 줄 모른다. ‘사지 바지를 입느냐 학교에 가느냐’ 그들은 고민한 것이다. 결국 아재비는 그 바지를 받고 중학을 포기했다. 그는 산청에서 일평생 농사를 짓고 살다 죽었다. 조카는 바지를 받고도 산청중학교(성철스님도 이 학교출신)에 몰래 입학했다. 고등학교는 아예 가출해 진주로 갔다. 그 조카는 국립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임상심리학 교수로 일평생을 살았다. 군복 한 벌이 한 인간의 앞길을 이렇게도 다르게 만들었다.
6·25전쟁 중에는 물론 그 후로도 약 20여 년 우리나라 남자들은 군인이 아니면서도 군복을 입고 다녔다. 이 옷 역시 면으로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군용이라 두텁고 질겨 실용적이었다. 나라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면서 민간인이 군복을 입지 못하게 나라에서 단속했지만, 근절은 불가능했다. 군복 외에 입을 옷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군복을 염색해서 입도록 권장했다. 이 덕에 신천에는 염색해주는 집이 난리가 났다. 손님이 줄을 섰다. 군복은 물론 다른 옷도 여기서 염색해 입었다. 미군부대서 나온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 염색약을 넣고 염색을 한다. 땔감 역시 미군부대서 나온 나무 부스러기다. 그러나 돈이 없거나 삐딱한 남자들은 군복을 그대로 입고 다녔다. 헌병은 이런 사람들을 데려가 옷에 ‘ㅇ’이나 ‘ㅅ’ 혹은 ‘X’ 표시를 해서 내보냈다. 대구 사람들은 체면을 중시해 이쯤 되면 어쩔 수 없이 옷을 사 입었다.
1970, 80년대 나라가 부강해졌는데도 군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때는 멋으로 젊은이들이 군복 윗도리를 검게 염색해서 입었다. 가장 인기있는 옷은 미군 군복이었다. 잘 염색해 다려 놓으면 옷에 윤이 나서 길에 다니면 쳐다보는 사람도 많았다. 여자들도 UN군 낙하산부대가 사용한 낙하산으로 옷을 해 입고 다녔다. ‘낙하산 기지’라고 해서 이 옷감은 아주 고상한 흰빛을 띠었다. 그래서 멋있는 여성복 재료가 되었다. 전쟁 때 최초로 선보인 나일론으로 낙하산을 만들었고, 이것은 색깔 좋고 질긴 덕에 옷감으로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이 옷감이 서양식 블라우스에는 안성맞춤이었지만 한복 저고리 옷감으로는 어울리지 않아 주로 젊은 멋쟁이 여성의 양장에 애용됐다.
전쟁 후 많은 기독교인이 전도하러 다녔다. 우리 집에도 자주 들렀는데 여성이 많았다. 동네 어른들은 이 사람들을 ‘전도부인’이라 불렀는데 차림새가 단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흰 옥양목 저고리에 검은 비로드 치마를 입고 옆에는 성경책을 끼고 다녔다. 전쟁으로 생지옥이 된 대구시내에 이런 차림의 요조숙녀들이 기독교를 믿으라고 다녔고 교회에서는 구제품도 주고 보육원도 운영하였으니 ‘그곳에는 정말 착하디 착한 천사들만 모여 사는 곳인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살던 시절에도 ‘마카오 신사’라고 해서 소수 돈 많은 남자들은 ‘세비로’(영어 ‘시빌 크로시스’에서 일인들이 세비로(背廣)라는 말을 만들었다) 양복을 입고 다녔다. 양복은 단추가 한 줄인 것은 가다마이(카타마에-片前)라고 했고 두 줄인 것은 로마이(료마에-兩前)라고 했다. 침산동서 금성 방직하던 김성곤 사장은 ‘쌍용’, 칠성동서 제일모직 하던 이병철 사장은 ‘삼성’, 수성동서 한국나일론 화섬을 하던 이원만 사장은 ‘코오롱’이란 기업을 이끄는 재벌이 되었다. 대구 사람들은 타지 사람들에게 욕먹어가며 지역 출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아주고도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했다. 경제계에서도 섬유를 통해 오늘날의 대기업을 만들어 주고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대구 사람들이 바보인지 대기업이 의리 없는 것인지 ‘성 회장’ 생각이 난다.
권영재(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 |
기사 작성일 : 2015년 04월 30일 |
가다마이입은 신사.(19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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