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2)앞산

思美 2015. 9. 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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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12)앞산

 

앞산도 팔공산과 마찬가지로 봉우리가 셋 있다. 산성산(653m), 성북산(589m), 대덕산(546m)이다. 하지만 이 봉우리들은 뾰족하지 않고 밋밋하여 필봉(筆鋒)과는 거리가 멀다. 그나마 대덕산은 자세하게 봐야 보이지 그냥 보면 평지에 가깝다. 이런 연유에설까 신기할 정도로 앞산에는 오래된 불상이나 탑 하나 없는 문화의 불모지이다.

1960년대 말까지 앞산에 가려면 시내에서부터 걸어갔다. 굳이 버스를 타면 명덕네거리에서 내려야 했다. 산 아래는 온통 보리밭이었다. 지금의 점보맨션, 개나리, 파크 아파트가 바로 그 자리다. 같은 시내지만 농사를 짓는 곳이어서 고등학교 다닐 때 농촌 봉사를 간 적도 있다. 일하다 쉬는 시간이 되면 주인이 새참을 내오는데 설탕물이다. 요즘 그렇게 흔한 설탕이 그 시절에는 철갑상어알 정도로 귀했다. 그 시절 우리 군인들이 비무장지대에 표지판 고치러 갈 때면 ‘북괴군’에게 “너희! 라면 먹어봤어?”라고 자랑하며, 겨우 구해 수통에 넣어간 설탕물을 북한군에게 주며 뻐기기도 했다.

또 산 아래에는 사과밭이 많았다. 이곳 과수원 마을에는 한때 입신양명(立身揚名)해 서울로 갔다가 낙향한 한솔 이효상 선생이 시를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현재 대명119안전센터 옆). 한솔 선생은 국회의장까지 지낸 분이다. 이 교수 생전에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내 나름대로 애국하느라 청빈의 길을 걸었었지만, 남들은 국회의장 하면서 한 밑천 잡은 줄 안다. 이럴 바엔 돈을 챙기지 못한 게 한이야”라며 냉소적으로 웃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다.

산기슭 동쪽에는 효성여자대학교(현재의 대구가톨릭대학교)가 있었고 그 뒷산은 공동묘지였다. 그 묘지도 산이라고 학교에서 소풍 장소로 자주 가던 곳이었다. 인근에 육군 L-19 비행장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골프장이었다고 한다. 거친 천 조각을 쇠막대기 위에 걸쳐 만든 장난감 같은 경비행기들이 뜨고 내리는 모습이 신기해서 일부러 보러 갔던 추억이 있다. 여기에 주한미군이 들어와 ‘캠프 워커’가 됐다. 가까운 곳에는 중앙정보부 대구분실이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시민들이 ‘박정희’ 하고 직함을 붙이지 않으면 잡아가고, ‘김일성 주석’이라면 또 잡아갔다. ‘북한군’이라고 해도 잡혀갔다. ‘북괴군’이 정답이었다. 대통령이나 유신을 욕하면 잡혀가 치도곤을 맞고 왔다. 심지어 법원으로 끌려가 재판받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유신시절 이곳은 정말 무서운 곳이었다.

현재는 ‘포항 예수 성심 수녀회’에서 중앙정보부 땅을 사들여 뇌성마비 청소년들을 치료하는 ‘요한 바오로 2세’ 집을 운영하고 있다. 가죽 점퍼의 검은 안경 쓴 자들을 여자들이 물리친 것이다.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말이 실감 간다. 요한 바오로 2세 집 아랫동네에는 갈멜 수도원이 있다.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도 나오지 못한다는 관상 수녀원. 여자들은 정말 천양지차다. 짧은 치마에 껌을 씹으며 동성로를 활보하는 처녀와 나이트클럽에서 관능적으로 흐느적거리는 중년 여인이 대구에 있는가 하면 앞산 밑에는 이렇게 기도, 묵상, 노동을 하며 하느님의 길로 가는 수녀들이 살고 있다.

앞산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가 ‘안지랭이골’이다. 이 골은 온통 검은 바위투성인데 예전에는 그 바위틈으로 물이 많이 흘러내렸다. 필자가 어릴 때 형편 좋은 사람들은 팔달교 다리 아래와 성주대교 아래 모래사장에서 찜질하거나 안지랭이에서 물맞이하며 피서를 즐겼다. 흰 광목으로 천막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들어앉아 찬물로 더위에 지친 몸을 식히는 것이다. 지금 보면 물도 별이 흐르지 않는데 ‘그때는 물이 많았나 보다’는 생각이 든다.

앞산에서 가장 산다운 곳은 ‘큰골’이다. 한문으로 ‘대덕골’이라는 이름도 있는데 시민들은 그냥 큰골로 부른다. 이 골짜기는 물이 많이 흐르고 숲이 우거져 아름답다. 지금이야 앞산도 나무가 많지만, 우리가 중`고교 다닐 때는 검은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나무란 거의 없는 황무지, 마치 달나라의 땅과 흡사했다. 나무가 땔감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적십자병원에 근무할 때 북한을 갔었는데 그곳 산이 우리 어릴 때와 흡사한 모양을 보고 잠깐 옛날 대구의 앞산을 다시 찾은 착각을 한 적이 있다.

정부에서는 심을 나무조차 없었는지 주말이면 산에 가서 풀씨를 따게 했다. 신발 주머니에 풀씨가 가득해지면 그것들을 학교에 갖고 갔다. 나중에 연탄이 보급되며 산은 다시 푸르러졌다. 그래서 필자가 20여 년을 객지살이하다 앞산에 와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나무가 우거진 골짜기가 정말 ‘우리가 풀씨 뿌리던 앞산 큰 골인가’ 하고 말이다.

큰골과 고산골 사이 능선은 자동차가 올라가는 길이 닦여 있다. 이 길은 산성산에 있는 공군부대로 가려고 만들어졌는데 길 중간에 조그마한 건물이 하나 있다. 겉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건물은 우리나라로 드나드는 모든 비행기의 출입을 통제한다. 굉장히 큰 일을 하는 곳이다. 이 능선으로 등산할 때면 필자는 ‘대구가 한국의 하늘을 다 잡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앞산은 성스러운 곳도 아니고 크고 웅장한 산도 아니다. 그러나 그 이름처럼 앞산은 우리 동네 앞에 있으면서 아기자기하고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산이다. 팔공산이 대구시민의 아버지라면 앞산은 우리의 엄마 산이다.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기사 작성일 : 2015년 03월 19일  

앞산 큰골 케이블카.(2013.11.)

1977년 앞산 큰골.

 

1973년 앞산 큰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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