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9)교동시장

思美 2015. 9. 8. 15:52
728x90
반응형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9)교동시장

 

교동시장을 속칭 ‘양키시장’이라고 부르지만 원래 그게 본이름이었다. 대구의 평범한 긴 골목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그곳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피란민들의 보따리 속에서 나온 물건과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이 뒤섞여 난장이 섰다. 그러다가 점점 규모가 커져 시장 비슷하게 형성되자 사람들은 ‘양키시장’이라고 불렀다. 1971년 그곳이 정식 시장이 되면서 동네 이름을 따서 ‘교동시장’이란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이 든 사람들은 아직도 교동시장을 양키시장이라고 부른다.

필자가 어릴 때, 해방은 되었지만 대구의 지명이나 물건 이름엔 일본식 명칭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한국전쟁 통에 서양 말까지 들어와 나이 든 사람들은 아직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잡탕 말’을 쓴다. 대구 토박이끼리 만났을 때 그 잡탕 말을 써야 진정한 고향 말로 들려 마음이 편하다. 표준말로 된 명칭을 쓰다 보면 ‘촌놈이 하루 서울 갔다 와서 서울말 쓰는 기분’이 들어 나쁜 버릇인 줄 알면서도 그때 쓰던 그 말을 고향 말로 알고 쓴다.

교동시장은 대구역과 시청이 가까웠고, 주위엔 유엔군 부대들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들끓기 시작하니 물건들도 많이 모이고 교환도 일어나게 되었다. 전쟁 중 많은 물자가 동촌비행장과 대구역을 통해 들어왔고, 당시 큰 건물이었던 시청은 시내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 주변에는 수많은 피란민들이 모여들었다. 시청에서 남전(남선 전기, 한전의 옛 이름)까지는 수많은 지게꾼들과 ‘리야카(리어커)꾼’, 그리고 ‘말 구루마꾼’들이 품을 팔기 위해 모여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니 먹을거리를 파는 장수도 모여들었다. 하지만 전쟁 중이라 식당이라 이름 붙일 건물은 없었고 길거리에 주로 아주머니들이 앉아서 먹을거리를 만들어 팔았다.

길거리 음식으로는 ‘팬케이크’을 구워 파는 사람이 있었는데 필자 같은 아이들이 많이 사먹었다. 지금도 부침개가 맛이 있는데 그 시절에는 오죽했을까? 전쟁이 끝나고는 팬케이크도 사라져 필자는 그게 단순한 우리의 ‘밀가루 전’으로 알고 온갖 가게를 다녀도 보고 어머니에게 ‘찌짐’을 부쳐달라고 떼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 가운데 가장 인기 있은 것은 ‘꿀꿀이죽’이었다. 서양 군인들이 버린 음식물 찌꺼기를 업자들이 식품으로 다시 만들어 파는 메뉴였다. 구운 식빵은 검은 표면 쪽 것과 속의 흰 부분을 칼로 썰어 반듯하게 분리해 쌓아 놓는다. 그리고 소시지와 햄은 먹던 이빨 자국을 떼어내고 나머지 부분을 잘라 식빵 옆에 가지런히 쌓아둔다. 이것들은 보기만 해도 침이 절로 꿀꺽 넘어가는 식품들이었다. 그러나 진짜 맛있는 것은 따로 있었다. ‘돼지죽 요리’였다. 온갖 고급 서양 음식(?)들이 다 섞여 있는 돼지죽을 불을 때어 끓이는데 그 향기는 밥을 먹고 온 사람들도 다시 창자를 꿈틀거리게 했다.

어른들은 이런 서양 음식을 못 사먹게 하였다. 철이 없던 그때는 왜 이런 맛있는 음식을 못 사먹게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고 때론 어른들이 원망스러웠다. 이제 필자가 어른이 되고 보니 그런 ‘거지 음식’을 못 먹게 한 부모님이 고맙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난 그래도 꿀꿀이죽은 먹지 않고 자랐어” 하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한다. 이렇게 시청 골목과 양키시장은 비슷한 물건을 팔고 사면서 어려운 한때를 견뎌왔다.

양키시장은 교동시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아직도 전쟁용품인 군용 담요와 군복, 대검, 삽, 수통 등을 파는 곳이 제법 많다. 특히 고스톱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군용 담요가 촉감도 좋고 화투 치는 소리가 좋다며 굳이 그것을 사러 교동시장에 가기도 한다. 젊은이들 중에서도 ‘밀리터리룩’을 하고자 하는 이들 또한 그곳에서 군복을 산다.

양키시장은 필자와 같은 꼬맹이들에게 천국이었다. 돈만 있으며 무엇이든 필요한 물건은 다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외제로. 아이들이 즐겨 찾는 물건은 구제품과 미군부대서 흘러나온 것들이었다. 비싼 것은 야구 글러브와 방망이, 카메라 같은 것이었고, 싼 것으로 빈 로션 통이나 속이 꽉 찬 고무공, 요요 같은 놀이용품, 초콜릿이나 비스킷 같은 과자들이었다. 빈 로션 통은 뚜껑에 구멍을 뚫어 물총으로 사용하기 위해 아이들이 많이 샀다.

간혹 어른들 심부름으로 ‘간주메’(통조림)를 사러 갔다. 통조림은 군용 비상식품에서 나온 것들이었는데 소고기 살만 들어 있는 것과 파인애플과 콩, 소시지, 국수를 함께 넣어 만든 걸쭉한 죽이 든 것도 있었다. 주인이나 손님들 모두 영어를 몰라 파인애플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사서 뚜껑을 열어보면 주스만 들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 이때의 실망감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영어를 배운 필자는 지금도 통조림을 살 때 과일이 들었는지 주스인지를 한참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어떨 때는 버터를 산다는 게 라드(돼지기름)를 사서 ‘울며 겨자 먹기’로 희고 맛없는 요리 재료를 억지로 먹은 경우도 있었다.

교동시장은 이북 출신 피란민들이 이룬 시장이다. 당시 어른들은 “피란민의 강인하고 진취적인 정신과 행동으로 만든 시장”이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면서 ‘만약 남한 사람들이 이북에 피란을 갔으면 전부 거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북 출신 피란민들은 그들의 옷가지까지 팔아 가면서 장사 밑천을 만들어 타향에서 적수공권(赤手空拳: 빈손과 맨주먹, 즉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음)으로 성공을 보여준 곳이 바로 교동시장이었다.

교동시장의 명물 중에는 ‘딸라(달러) 장수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가게도 없이 남의 점방 앞 의자에 앉아 달러를 사고팔았다. 얼마 전 혹시나 해서 달러 상인들이 있던 그 자리에 가보니 호호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담요로 다리를 감싼 채 앉아 있었다. ‘늙은 금순이’가 된 그 할머니가 한국전쟁과 교동시장 생성의 마지막 산증인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분을 무형문화재로 등록이 여의치 않으면 시장을 문화재로 등록하면 어떨까 싶다.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기사 작성일 : 2015년 02월 26일

 

교동시장.

 교동시장.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