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권영재의 내고향 대구(매일신문)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7>남문시장

思美 2015. 9. 8. 15:50
728x90
반응형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7>남문시장

 

남문시장은 오래된 시장이다. 그러나 별 특색이 없는 시장이다. 규모도 그다지 크지 않고 파는 물건 종류도 다양하지 않다. 또 특별한 것도 없다. 그러나 남문시장은 시장 자체보다 그 주위를 둘러싼 환경이 품위가 있고 옛 향수를 지닌 곳이 있어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시장에는 아직도 이름 있는 보신탕집이 몇 군데 남아 있어 나이 든 사람들에게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한국전쟁 전까지 대구에는 보신탕, 냉면, 빈대떡, 순대 같은 음식들이 없었다. 북쪽 사람들이 피란 오면서 그런 음식들이 자연스레 따라왔는데 대구 원주민은 시장에 가도 그런 음식을 잘 사먹지 않았다. 필자가 어릴 때 피란 온 사람들이 시장에서 깡통에 구멍을 숭숭 뚫어 메밀 반죽 덩어리를 눌러 국숫발을 내어 삶곤 했던 기억이 가끔 떠오기도 한다.

남문시장은 또 1980년대 ‘수북 불고기’가 유명했다. 불고기의 이름 앞에 붙은 ‘수북’이라는 말은 고기를 많이 담아주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지금은 불고기가 우리나라 대표 음식으로 외국인들에 소개되고 있지만 불고기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 한참까지도 식당에서 팔지 않던 음식이었다. 1950년대에 대구에 불고기가 처음 등장했는데, 한동안은 주인이 고기를 주방에서 구워 손님에게 내놓았지만 얼마 뒤엔 즉석 불고기가 나왔다. 그 무렵 대구에서 유일한 불고기 집은 강산면옥이었다. 이 집은 원래 냉면집인데 특별한 날 그곳에서 냉면은 잘 먹지 않고 불고기를 먹는 손님들이 많았다. 그 식당에는 텔레비전이 있었다. 흑백 화면이고 미군 방송이어서 영어로만 나왔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신기해 한 번 갈 것도 두 번 가곤 했다.

교동시장에서 출발한 즉석 불고기가 훗날 남문시장까지 진출해 모양을 조금 변형시켰는데 그 맛이 괜찮아 유명해진 것이다. 1960년대 중반까지 서울에서는 즉석 불고기를 하는 집이 별로 없었다. 종로와 명동에 있는‘한일옥’이 유일한 대형 불고기 집이었고 이후에 충무로의 ‘삼오정’, 서울시 경찰청 부근(당시 남대문시장 부근)인 북창동에 불고기 집들이 생겨났다.

“이 책은 ‘국제연합 한국재건위워회’(운크라)에서 기증한 종이로 찍은 것이다. 우리는 이 고마운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층 더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한국을 부흥하고 재건하는 훌륭한 일꾼이 되자.”

한국전쟁 동안과 전쟁이 끝나고 얼마 동안 초등학교 교과서 마지막 장 속꺼풀 안쪽에는 이 문장이 반드시 들어가 있었다. 그 옆에는 ‘우리의 맹세’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국제연합이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위해 교과서를 만들도록 많은 돈을 원조해 주었다.

당시 교과서는 무료가 아니었다. 필자가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는 날, 담임선생님이 우리 반 아이 7, 8명을 불러 교단에 올라오게 하였다. “얘들은 교과서 없이 지난 1년을 학교에 다녔다. 책 없이 공부했던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했다. 아이들이 쭈빗거리며 무안해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 가운데는 구두를 닦으며 학교를 다닌 애도 있었다. 그 친구들은 결국 중학교 진학을 못 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우리나라는 최빈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운크라가 책도 원조해 주지 않고 유니세프조차 우유와 옥수수 가루를 보내주지 않자 아이들은 집에서는 배고픔에 울고 학교에서는 사친회비를 못 내고, 책값이 없어 울었다. 많은 학생들이 형이나 누나가 물려주는 책으로 공부했다. 책을 물려받지 못한 아이들은 고서점에서 책을 사야 했다.

대구의 헌 책방은 원래 시청 옆 골목에서 시작하였다. 전쟁 중이거나 휴전 후에도 시청 부근은 전쟁 문화와 노동시장의 집결지로 대구의 시작이요 끝이었다. 수많은 지게꾼들과 리어카꾼들이 일감을 기다리고 있던 곳도 그곳이었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부산물을 죽으로 끓여 ‘꿀꿀이죽’이라고 이름 붙여 팔던 곳도 시청 골목이었다. 온갖 외국 물건이 거래되던 교동시장도 시청 옆 골목에서 시작하였다.

아무튼 헌 책방도 그런 이유로 시청 옆길을 꽉 메우고 있었다. 시청 바로 길 건너 ‘남전’(남조선전기, 한전의 옛 이름)에서 칠성시장 입구인 ‘해방골목’까지 좌우는 전부 헌 책방들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헌 책방은 시청 부근이 개발되기 시작하고 각 가정의 경제적 형편이 좀 나아지며 헌 책의 거래도 줄어들자 당시 변두리였던 남문시장 쪽으로 옮겨갔다. 왜 하필 남문시장 근처로 옮겨 갔는지는 그 무렵 필자가 대구에 있지 않아 잘 모르겠다. 서울 청계천의 고서점들은 원래 그 자리에서 시작해 지금도 거기에 있고 교과서 외에도 여러 종류의 옛날 책들이 거래되고 있다. 대구는 주로 교과서를 거래했다는 점이 서울과 달랐다.

남문시장의 남쪽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명덕네거리까지만 도로가 포장이 되어 있었다. 대구대학(현재 영남대학교 의과대학) 쪽으로는 비포장도로였는데 그곳이 대구의 남쪽 끝이었다. 그 네거리에는 ‘2`28 기념탑’이 있고 부근에 경북여고와 대구고 등이 있었다. 시장의 서쪽에는 천주교의 메카 격인 성스러운 대구대교구청과 성모당이 있었고, 시장 입구에는 ‘대도극장’ ‘대한극장’ 등 유흥건물이 있어 성속의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남문시장은 그 자체로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그러나 그 주위는 이렇게 학문과 문화, 종교가 어우러지며 성속이 조화를 이뤄 우리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그런 곳이었다.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기사 작성일 : 2015년 02월 12일

남문시장 대도극장근처 헌책방.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