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영남

[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9] 동성로 -2007/05/10-

思美 2010. 4. 16.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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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9] 동성로
옛 동인호텔 근처에 '박근혜 生家'있어…요즘 풍수학자들 관심대상 1호
대구백화점의 전신 대구상회가 있었던 자리.
대구백화점의 전신 대구상회가 있었던 자리.
동성로 구제 옷 골목.
동성로 구제 옷 골목.
동성로 떡볶이 골목.
동성로 떡볶이 골목.
제18회 동성로축제를 알리는 축하퍼레이드 장면.
제18회 동성로축제를 알리는 축하퍼레이드 장면.
동성로 골목에서 만난 나무전주.
동성로 골목에서 만난 나무전주.

일제시대땐 초가집 많고 초라한 상권, 교동방면은 피란민 개척시장으로 유명
최근 구제옷 가게 늘면서 색다른 풍경

'젊은이의 거리, 동성로'에 익숙해서인지 '읍성의 동편 길'이라는 원래 의미가 낯설 정도다. 대구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고 복잡한 거리이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이 곳의 상권은 북성로와 서성로, 남성로 근처에도 못 갔다. 초가집이 많았고 그 사이에 상점이 드문드문 있던 정도. 상권으로만 보면 사성로(四城路) 중 가장 열세였던 동성로가 지금은 대구 제일의 중심거리가 된 것이다.

격변하는 근·현대 시절에 변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마는 동성로야말로 옛 것 그대로 남아있는 게 거의 없는 거리다. 한 해에 몇 번씩 바뀌는 상점도 많으니까. 현기증이 나는 세월 여행은 북성로가 끝나는 지점, 지금의 대우빌딩 앞에서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방향을 택하기로 한다.

교동(대구향교가 있던 곳이라고 해서 교동이라고 불렸다) 방면의 동성로는 6·25전쟁 시절 피란민들의 개척시장이었다. 다방, 빵집, 음식점, 영화관 등으로 번창했다는데, 지금은 남쪽 동성로에 그 영광을 거의 내주었다. 국채보상로를 기준으로 북쪽은 전반적으로 침체돼 있는데, 요즘에는 구제옷 가게 골목이 늘어나면서 색다른 도심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2000년대 초창기만 해도 중년을 대상으로 하는 덤핑가게들이 주류였지만, 요즘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늘면서 독특한 분위기의 구제옷 가게들이 많다. 특히 LG패션 건물 안쪽으로 이어지는 짧은 골목은 제법 운치가 있다.

지금의 SC제일은행 대구영업본부 앞이 읍성의 동쪽 대문, 진동문(鎭東門) 자리였다. 경상감영의 진영(鎭營: 지금의 한일극장과 교보문고 일대), 즉 군부대가 있는 동쪽 문이라는 뜻에서 진동문이라 불렸다. '대구부성 진동문터'라 적힌 비석이 은행 앞에 있다.

지하보도로 국채보상로를 건넌다. 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남북의 동성로는 확연히 다르다. 동성로를 '젊은이의 거리'로 말할 때는 대개 남쪽 동성로를 말하는 것이다.

동성로는 대구백화점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지금의 대백 자리(동성로2가 174번지)는 평당 공시지가가 6천446만원으로 지난해 기준, 수도권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두번째로 비싼 땅이다. 대백 설립자인 고(故) 구본흥씨는 옛 동인호텔 입구 모퉁이에 '대구상회'(현 신헤어라인 건물 자리)라는 구멍가게를 인수했는데 이것이 대백의 전신이 된다. 대백은 교동 입구에 있다가 1969년 지금의 자리로 와 동성로의 간판이 되었다. 기억하는 이는 드물지만, 동성로에는 백화점이 하나 더 있었다. 지금의 한국투자신탁 대구지점(WHO 매장 건물) 자리에 한도백화점이 있었는데, 신세계백화점이 73년 이를 인수해 '신세계 대구지점'으로 열었다. 영업이 잘 안 된 탓인지 3년 뒤인 76년에 신세계 대구지점은 철수한다. 롯데백화점의 대구 진출 이후 대백이 신세계백화점과 제휴를 맺었으니, 신세계의 '컴백'인 셈이다.

옛 동인호텔 입구 모퉁이가 대구상회 자리, 쇼핑몰 프라이비트 앞은 읍성시절 동소문…한투신탁 대구지점은 한도백화점 있던 곳

옛 동인호텔 근처는 요즘 풍수지리학자들이 부쩍 관심을 가지는 곳이다. 이 근처에 박근혜의 생가가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결혼 후 2군사령부에 근무하면서 이 근처 한옥집에 살았다 한다. 풍수학자 김두규씨(우석대 교양학부 교수)는 한 시사잡지에 이 자리를 '험난한 시대, 위기의 시대에 거친 광야에서 깃발을 들고 꿋꿋하게 나아가는 모양새'로 표현했다. 타고난 지도자의 땅이지만, 문제는 난세에 빛을 발하며 평시에는 힘을 잃을 지기라는 것이다. 올해를 과연 난세로 볼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고 했다니, 소신있는 평이라고 보기는 어렵겠다.

프라이비트 앞에는 읍성 시절 동소문(東小門)이, 중앙파출소 앞 분수대 근처에는 남장대(南將臺)가 있었다. 동소문은 4대 성문 외에 서소문과 함께 출입이 용이하도록 만든 작은 문이었다. 장대는 성벽 위에 있던 장군의 지휘소인데, 읍성에는 4장대가 있었다.

북성로 끝지점에서 출발한 발길이 남성로 출발점(약전골목 네거리)에 이르면 동성로의 어질어질했던 시간 여행은 끝난다. 주말이면 대구시민 10명 중 1명이 걷는다는 도심지 최고의 보행구간. 대구시에서 '동성로공공디자인위원회'를 만드는 준비를 하고 있다는데, 어지러운 간판, 좁은 보행공간, 넘치는 차량, 노점상 등 동성로의 현안을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하다.

 

2007-05-10

 

[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9] 동성로-인터뷰, 50년 한자리 인제약국 김숙자씨

"권투·레슬링 중계하는 날엔 약국이 동성로 사랑방이었죠"
젊은이들의 아지트 동성로. 퍼득퍼득 살아움직이는 동성로 한켠에 50년째 한자리를 지켜온 약국이 존재한다. 인제약국. 동성로 터줏대감으로 통한다. 초가와 한옥, 상가가 듬성듬성하던 1950년대 중반 김숙자 약사(75)는 결혼과 동시에 약국을 열었다. 대구백화점보다 10여년이나 앞선 때였다. 김 약사는 약국 이름처럼 인술제민(人術濟民)의 마음으로 이 약국을 운영했다고 말했다.

인제약국 앞 광장은 지난 반세기동안 역사의 현장이었다. 민주화를 외치는 젊은이들이 동성로에 몰려들었다. 수많은 집회와 시위가 동성로에서 이어졌다. 김 약사는 "2·28학생의거와 4·19혁명, 6월 항쟁을 직접 보면서 세상의 변화를 느껴왔다"고 말했다.

1970~80년대 인제약국은 '동성로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박치기 명수' 김일이나 '4전5기의 신화' 홍수환의 권투경기를 비롯해 각종 국가대표 경기중계 때면 약국 TV수상기에 행인들의 눈과 귀가 쏠렸다. 김 약사는 "경기결과에 따라 함께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김 약사는 가끔 옛날 동성로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의 행방을 묻는 손님을 만난다. 김 약사만큼 동성로의 과거와 현재에 정통한 인물은 드물기 때문이다. 2군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장군은 간장약 단골로 기억했다. 김 약사는 요즘 동성로의 변화에 아쉬움을 느낀다.

김 약사는 "눈에 보이는 외형적 변화보다 사람들 마음이 갈수록 황폐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2007-05-10

 

[골목탐사팀과 떠나는 워킹투어 .9] 동성로-꼭 맛보고 가세요
배고픈 날 동성로를 걷다보면 고민이 생긴다. '뭘 먹지?' 대구역 앞 대우빌딩에서 중앙파출소에 이르는 동성로는 그야말로 맛의 별천지. 비좁은 골목을 따라 분식점이 꼬리를 잇는 교동 먹자골목을 비롯해 동성로 떡볶이골목, '퓨전음식의 신기원' 아카데미시네마골목까지 눈길 끄는 맛집들이 한둘이 아니다.

-대백 남문 양념어묵 포장마차: 서울 명동에도 진출한 '대구 길거리음식의 지존'이다. 매콤한 떡, 잡채, 치즈 양념어묵이 2개 500원.

-전원돈까스(사진): 대백에서 중앙파출소 방향으로 가다보면 나온다. 돈가스에 우동면이 함께 나온다. 1인분은 3천원이고, 곱배기는 4천400원.

-상주식당: 대백 후문에서 지하상가로 가는 샛골목. 50여년 전통의 추어탕 집. 재료인 논미꾸라지를 조달할 수 없는 1월과 2월은 쉰다. 한 그릇에 6천원.
2007-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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