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길 낭만 사이로 폭력의 역사가 겹겹이… '덕수궁 회화나무 사건' 세상에 알린 주인공…"서울이 역사도시로 거듭나려면 덕수궁 터 되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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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 집무실이었던 경교장에는 안두희가 쏜 총알이 지나간 유리창문이 복원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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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에 남아 있는 옛 러시아 공사관 건물 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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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곱게 물들어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덕수궁 돌담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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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박물관의 유관순 교실. 1910년대 교실을 재연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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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집무실이자 외국사절들의 알현실로 사용되었던 중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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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 듣기만 해도 낭만적이다. 팔짱끼고 걸을 연인이 옆에 있고 눈이 오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정동은 덕수궁을 중심으로 그 언저리 동네를 아우르는 지명이다. 하지만 이렇게 낭만적으로 보이는 곳에 폭력으로 얼룩진 슬픈 역사가 겹겹으로 스며 있다.
첫번째 폭력은 조선시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동이라는 지명은 원래 이곳에 정릉(태조 이성계의 둘째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묘)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경복궁에서 지척인 이 곳(지금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묻혔는데, 첫째 왕비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그녀를 미워해 묘를 미아리 밖으로 이장해 버렸다. 이방원이 신덕왕후가 낳은 두 이복형제인 방번과 방석을 죽인 것은 역사시간에 배워 다 알 것이다.
두번째 폭력은 조선시대 말로 내려와 덕수궁의 이름과 연관된다.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었다. 1907년 일제의 강압으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고종의 궁호가 '덕수'로 정해지면서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뀐 것이다.
세번째 폭력과 슬픔은 잘려진 덕수궁에 기인한다 . 원래 경운궁은 오늘날 우리가 정동으로 부르는 지역 전체를 포함했다. 그러나 일제가 멋대로 궁을 파괴하고 중간에 길을 내고 담을 쌓은 것이 덕수궁 돌담길이 됐다. 잘려나간 경운궁 한쪽 자리에는 '하비브 하우스'(Habib House)라고 불리는 미국 대사관저가 들어서 있다. 일제가 잘라낸 궁터에 세계 최강국 대사관저가 자리잡았으니, 대한제국을 둘러싼 세계 열강의 정치를 반영한 것일까.
우리 근대사의 가장 치열했던 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간인 만큼 정동 답사는 역사적인 공간 위주로 하면 된다. 출발은 덕수궁에서 한다. 궁궐로는 유일하게 근대식 전각과 서양식 정원이 있는, 중세와 근대가 어우러진 장소다. 웅장하진 않지만 아기자기한 전각 배치를 유심히 보자.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수문장 교대의식이 치러진다. 관광객들을 위한 행사이니만큼, 특히 외국인 관광객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정동극장 뒤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서양식의 2층 건물 중명전(重明殿)이 나온다. 지금은 건물 수리 중이어서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지만, 내년 공사가 완료되면 꼭 답사해 보기를 권한다. 1900년 경운궁 별채로 건립돼 황실 도서관으로 쓰이다가, 1904년 경운궁의 많은 전각들이 불에 타 고종황제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황제의 집무실로도 쓰였다.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접견한 곳도 이 곳이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포기하는 을사늑약(1905년)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도 이 곳이다. 일제시대 때는 술마시고 춤추는 서울구락부(서울클럽)로 전락했다가, 한 민간기업 소유를 거쳐 정부가 예산을 들여 구입하면서 문화재(사적 제124호)로 대접받게 됐다. 수리를 마치면 역사적 의미를 살린 교육장소로 쓰일 예정이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큰 길로 나와 캐나다대사관 쪽으로 꺾어 끝까지 올라가면 겉보기에 우아한 르네상스식 건물이 나오는데, 바로 구 러시아공사관(사적 제253호)이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상당부분 파괴됐고, 현재는 탑부만 남아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1896년 세자(뒤의 순종)와 함께 옮겨가 이듬해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피신했던 곳이다.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있는데 덕수궁까지 연결돼 있다고 한다. 건물 분위기가 조금 전에 본 중명전과 비슷하다 싶었는데, 두 건물의 설계자가 같은 사람(러시아인 사바틴)이란다. 이 곳에서 덕수궁으로 가는 길이 치욕스러운 아관파천 길이다. 미 대사관저가 중간에 있어 그 길을 밟아볼 수 없는 게 안타깝다.
다시 큰 길로 나와 왼쪽으로 이화여고에 들러본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신교육기관이다. 2006년 개교 120년을 기념해 이화박물관을 세웠다. 여고 교복 변천사에 근대 당시 학교 풍경도 볼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대법원 건물이었는데, 정면부는 그대로 남아있으니 근대건축물 특징을 확인해도 좋겠다.
정동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곳은 강북삼성병원 안에 마련된 경교장(京橋莊·사적 제465호)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사용했던 숙소이자 집무실이며, 안두희에게 암살(1949년 6월26일)당한 곳이기도 하다. 선생의 집무실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돼 있다.
낭만적으로만 보이던 정동에서 역사를 한꺼풀씩 벗겨보니 조선시대에서 근대로,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길에서 겪어야 했던, 그 숱한 폭력과 그로 인한 시대의 슬픔이 긴 열을 이룬다. 편안한 이 시대 덕수궁 돌담길의 낭만은, 근대의 가장 가슴 아팠던 시기를 겪어야 했던 이 곳이 슬픔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갖다붙인 가짜 얼굴인지도 모른다.
인터뷰-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2004년 5월이었어요. 옛 경기여고 운동장에 있는 할아버지 회화나무에 잎이 안피는 거예요. 다른 데 있는 회화나무는 다 잎이 피는데 말이죠. 한 밤 중에 그 할아버지 회화나무에게 달려갔죠. '평우야, 평우야. 나 아프다'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아니나다를까 나무 가운데에 불이 나 있는 흔적을 그 때 제가 발견한 거예요. 바로 언론에 제보했고, 그래서 덕수궁 터 회화나무 사건이 알려지게 됐죠."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황평우 문화재위원은 일제에 의해 잘려진 덕수궁 옛 터 복원 운동을 몇 년째 하고 있다. 그 운동 과정에서 덕수궁 터의 일부인 옛 경기여고 운동장에 있는 300년 된 회화나무가 죽어가는 사건을 세상에 알린 주인공이 됐다(이 사건이 방화사건이었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 정부가 경기여고 터에 미대사관을 신축하려고 한 것을 "옛 궁궐터에 대사관을 지을 수 없다"며 반대운동으로 좌절시킨 주역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정동은 근대 역사의 현장이 몰려 있는 곳입니다. 일부는 남아있지만, 상당 부분은 이미 파괴가 되었어요. 일제에 의해 파괴된 덕수궁 터를 온전하게 되찾아야 서울이 역사 도시로 다시 태어날 겁니다."
그는 "저 할아버지 회화나무가 저 덕분에 살았으니, 할아버지 나무 귀신이 앞으로 나를 지켜줄겁니다"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2007-12-06 |